[배인준 칼럼]대한민국에 스파이대장 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7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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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북한이 큰일 내거나, 북한에 큰일 터질 때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은 필연이다. 정보(情報)에서 판판이 당하는데 어쩌겠나.”(국가정보기관 전직 간부)

MB 정권, 결정적일 때 情報 실패

우왕좌왕은 대응하려고 안간힘이라도 쓴다는 긍정적 의미가 조금은 있다. 국가보위 최고책임자인 대통령부터가 ‘정보에 대한 통 큰 무능과 둔감’을 드러내는 게 더 문제다. 2006년 7월 북한이 대포동 2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사일 7발을 쏘았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늑장대응을 비판받자 “호들갑을 떤다고 뭐가 달라지느냐”며 화를 냈다. 정보 문외한들을 국가정보원장에 앉혀 테니스나 바둑 취미를 살려줬고, 어떤 국정원장에겐 ‘사고만 치지 말라’고 했던 대통령이다. 당시 정부는 ICBM과 함께 남한이 사정권인 단거리미사일이 그때 발사될 줄 모르고도 “예상범위에 있던 일”이라며 정보실패를 덮으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 사망 발표 사흘 뒤인 22일 여야 대표들에게 “우리의 정보력은 걱정할 만큼 그렇게 취약하지 않다”고 했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지난 9월 언론계 사람들에게 “매일 보고서를 천 페이지나 읽는다. 아랫사람들이 의미를 놓친 부분을 챙겨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요긴하게 활용한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과 원 원장은 ‘국가정보의 위기’를 못 느끼는 것일까. 국가정보가 민간정보와 괴담의 공격을 받는 현실이 그저 비뚤어진 국민성 탓일까.

19일 북이 특별방송을 하는 순간까지도 정부는 김정일 급사라는 북의 최대위기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2시간 전부터 아나운서가 흐느끼고 장송 분위기가 확연했는데도 정보기관은 비상벨을 울리지 못했다. 북한의 막후를 읽어낼 능력도, 매뉴얼에 따라 상대를 분석해낼 기본기도, 주적(主敵)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도 의심할 만하다. 미국도 몰랐는데 뭘 그러느냐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정보자주(自主) 포기요, 조금 빨리 알았다고 달라질게 있느냐고 한다면 막대한 세금 써가며 정보기관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

천안함이 폭침당해 장병 46명을 희생시킨 것도 정보실패에서 비롯됐다. 연평도 포격을 당하고 허둥댄 것도 같다. 천안함 폭침은 북한 잠수정이 기지에서 사라진 것을 영상정보(이민트·image intelligence)로 확인하고도 둔감하게 흘려버리지 않았다면 모면할 수도 있었다. 연평도 상황은 북한이 포격을 예고한 전화통지문 신호정보(시진트·signal intelligence)가 있었고, 북쪽 개머리해안에 포 다리를 세운 방사포가 사진 영상정보로 확인됐음에도 안이하게 해석해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모사드 “智略 없으면 국민 망한다”

작년 3월 26일의 천안함 비극은 최종 상황만 보면 순간적으로 당한 것이지만 정보의 관점에서는 조짐이 장기간 이어져왔다. 2009년 11월의 대청해전 이후 북한군이 보인 일련의 움직임이 그랬다. 특히 작년 1, 2월 북한군의 1, 2차 성전(聖戰)선언을 우리 쪽은 너무 가볍게 봤다. 서해의 수심 얕은 해역에선 잠수함정 공격을 못할 것이라는 통념도 허(虛)를 찔렸다. 정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도 상상해야 하는 영역이다.

시진트·이민트 같은 과학정보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을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이 인간정보(휴민트·human intelligence)다. 북한은 공포로 무장된 체제라는 점에서 우리의 대북 인간정보 능력을 키우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다고 방치하고, 흔한 공무원처럼 국내활동에 매달린다면 안보의 파수꾼인 정보기관의 정체성을 팽개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지략이 없으면 국민이 망한다’는 모토로, 국가지략의 중심에는 모사드가 있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

우리 정보기관에도 책무의식이 강한 요원들이 많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제대로 서려면 대통령부터 국가보위와 국익극대화를 위한 정보의 중요성을 뼛속까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정보기관이 국가에 충성할 수 있도록 인적 조직적 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요원들이 본래의 역할과 직무에 충실한 한, 정치적으로 희생시켜선 안 된다. 정보업무의 특성상 실패한 공작이라도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당사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치권과 국민도 정보요원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때로는 감시하고 때로는 응원해야 한다.

정보기관 책임자의 최종적 실체는 ‘스파이 마스터’다. 그럼에도 역대 대통령은 그런 비상(非常)한 일을 전문성 없는 심복들에게 맡기고, 국가가 아닌 자신에 대한 충성을 기대했다. 평화 치적이 절실했던 대통령이 운명적으로 북한을 냉정하게 대할 수 없는, 오히려 북한에 영합할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들이 스파이대장 역할을 똑바로 할 리가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스파이대장다운 정보기관장이 있는가.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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