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MB식 ‘북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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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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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정부가 북한에 지원하려던 영유아용 영양식 54만 개를 대량 폐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대북 수해 지원을 위해 마련한 것인데 북한이 끝내 접수 의사를 밝히지 않아 공매에 부쳤지만 구매 희망자가 없어 유찰됐기 때문이다.

쌀과 시멘트로 ‘통 크게 지원해 달라’는 북측 요구에도 정부가 전용 가능성을 들어 일방적으로 물품을 선정한 결과다. 주민들은 굶주리는데도 ‘찔끔 선심’은 받지 않겠다는 북한의 터무니없는 배짱을 우선 탓해야 하겠지만, 접점을 찾지 못하는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요즘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새해 대통령 업무보고를 앞두고 고민이 많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의 행태를 ‘불가측성’이라는 모호한 말로 넘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련 부처의 업무보고가 북한의 신년공동사설이 나온 뒤로 잡혀 다행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당장 대통령 생각도 모르겠는데…”라는 하소연도 들린다. 현 정부 초 업무보고 때 얻은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당시 통일부는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보고했다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더는 그런 식으로 안 된다”는 질타를 받았고, 얼마 뒤 장관마저 경질됐다.

올 한 해 남북관계는 긴장 속에 장기 교착상태를 보였다. 단발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번번이 일회성 만남에 그쳤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북한의 태도 변화, 즉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듯하다. 이는 북한에 대한 물정 모르는 평가로 이어졌다.

4월 이 대통령은 “혹자들은 (북한에) 너무 빡빡한 것 아니냐는데…”라며 남북관계 진전을 이렇게 자평했다. “대통령이 돼서 북에서 날아오는 공문을 보면 ‘몇 날 몇 시에 나오라’고 한다. 뭐 때문인지, 누가 나오는지 안 밝힌다. 나가서 알아보고 해야 했다. 대한민국이 국격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는 ‘몇 날 몇 시에 이런 의제로 면담하고자 하오니 귀측의 협조를 바랍니다’라고…. 대단히 많이 바뀌었다.”

정말 북한이 다소나마 고분고분해진 것일까. 5월엔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하는 당국자 간 비밀접촉이 이뤄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은 남북 접촉을 일방적으로 폭로하며 “앞뒤 다르고 너절하게 행동하는 역적패당”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통령은 10월 외신 인터뷰에선 “과거 남북대화를 열 때 핵무기가 의제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대화는 대북지원 규모와 시기에 국한될 뿐이었다. 이제 실질적인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징검다리로 여긴 남북 비핵화 회담을 ‘대북 원칙의 성과’로 자평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위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 북한은 ‘청와대 불바다’ 위협을 하며 한동안 자제하던 ‘리명박 역도’ 비난도 재개했다. 남측의 ‘유연한 대북 접근’에 대해서도 “유치한 말장난”이라고 비난했다. 한편으론 ‘자주권’을 내세워 우라늄 핵개발 중단을 거부하고 장거리미사일 엔진연소 실험도 하고 있다.

북한은 한 손으론 악수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론 방아쇠를 당기는 양극단의 전술을 전매특허처럼 활용해 왔다. 세계적인 권력 변동기를 맞은 내년에도 북한은 변화무쌍한 곡예를 펼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북한의 속내는 읽지 않고 일부 보고 싶은 제스처만 골라 아전인수식 해석을 계속한다면 내년 한 해가 너무 아찔할 것만 같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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