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정훈]강용석과 ‘저주의 마법’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5일 03시 00분


박정훈 사회부 차장
박정훈 사회부 차장
강용석 의원처럼 국민적 질시를 받은 정치인은 헌정사에 없었다. ‘국민 밉상’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수십억 원의 뇌물로 치부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정치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는 게 국민 정서다. 정치깨나 하는 사람치고 전과 없는 사람이 드문 것도 정치인의 불법에 가혹하지 않은 정서 탓이다.

그러나 강 의원에게는 유독 단호했다. 그가 사석에서 대학생들에게 “아나운서 되려면 다 줘야 한다”고 한 게 벌써 지난해 7월 일이다. 술집 여종업원의 가슴을 만지는 동영상이 공개된 정치인이 국회 사무총장까지 지내고, 기자를 성추행한 의원이 4선에 성공한 것을 감안하면 1년 넘게 쏟아진 비난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많은 비리 국회의원 중 단 한 명이라도 제명안이 상정된 적이 있던가. 이쯤 되면 강 의원 본인도 ‘저주의 마법에 걸린 것 같다’고 할 판이다.

동료 의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비난 여론을 의식해 제명안을 상정해 놓고도 출석 의원 절반이 넘는 134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김형오 의원이 “죄 있는 자 돌로 치라”고 할 때 “잘했어” “살신성인 했어”라고 호응한 의원들은 ‘저질 여론’을 탓했을 게 뻔하다. 그들은 왜 반대표를 던졌는지 소신조차 밝히지 않고 무기명의 그늘 뒤에 비겁하게 숨었다.

강 의원은 사건이 터진 후 1년여 동안 ‘식물 의원’이었다. 지난해 12월 상임위에서 삼성가(家)의 병역면제를 문제 삼은 것이 고작이었다. ‘잘못된 민심’이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여론을 돌려보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반응은 “너나 잘하세요”였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이자 친이계라는 이점 덕에 의원이 된 뒤에도 변호사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지난해부터는 그마저도 뜸해졌다고 한다.

민심도 더는 그를 국회의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를 뽑은 것 자체가 국민 스스로에게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사회적 선망 직군인 아나운서를 막가파 식으로 짓뭉갠 특권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희롱 발언 이후 그가 내놓은 거짓 해명과 기자에 대한 무고(誣告), 해당 대학생을 위증 혐의로 고소하는 과정에서 민심은 더 큰 상처와 모멸감을 받았다. ‘저런 인간에게 내 주머니를 털어 세비(歲費)까지 줬다니….’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조폭 두목은 자신의 뜻을 거역한 부하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 “넌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국회는 국민이 왜 강 의원의 제명을 원했는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그 정도 일로 감히 국회의원을…’이라는 소아병적 동지의식과 ‘어차피 끝난 사람인데…’라는 동정론은 삐뚤어진 소신으로 이어졌다. 제명안 부결은 강 의원이 가진 특권의식을 국회 전체가 공유한 결과였다. 그들은 강 의원이 정치인의 값어치를 얼마나 떨어뜨렸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국회의원은 자주 ‘국민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산다. 가끔은 주인인 줄 알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성희롱 의원을 쫓아내라’는 국민의 명령에 ‘30일 출석정지’라는 눈치 보기로 맞선 것은 그들 스스로가 공복(公僕)이기를 포기한 행동이었다. 주인의 준엄한 꾸짖음을 ‘저주의 마법’ 따위로 치부하다니…. 그럴 때는 매섭게 회초리를 드는 것이 주인의 일이다. 다시는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매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다른 종을 써야 한다. 그것만이 대의제(代議制) 민주주의에서 주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박정훈 사회부 차장 sunshad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