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관계는 공존공영, 상생상화(相生相和)의 관계가 돼야 한다. 노조 있는 기업보다 나은 근로조건과 인간 존중의 실천을 위해 각고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투자 가치가 있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희수(喜壽·77세)를 맞아 1986년 쓴 호암자전(湖巖自傳)의 한 대목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긴 기록은 이 두 문장뿐이다. 그의 경영지침에는 ‘사원을 일류로 대접하라’란 것도 있다. 자서전과 맥이 통하는 말이다. 노조 없이 최상의 성과를 내 직원을 최고로 대우하는 것이 비(非)노조 경영 철학의 핵심인 듯하다.
삼성만큼 노조에 단호한 기업은 없다. 선대 회장의 철학이 아니더라도 노사 갈등에 발목이 잡히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확신이 삼성을 지배한다. 1938년 삼성상회 창업 이후 73년간 삼성에 ‘진짜 노조’가 허용된 적은 없다. 1977년 제일제당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는 삼성중공업 삼성SDI 삼성에버랜드가 노조 설립을 추진했지만 벽을 넘지 못했다. 삼성은 그만큼 집요했다.
삼성은 ‘노조 탄압 기업’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83개 계열사에서 254조6000억 원의 매출에 24조5000억 원의 순익을 냈다. 적자를 내는 계열사는 없었다. 임직원 31만4000명이 평균 8640만 원의 연봉을 받는다. 복지 혜택은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좋은 대접을 받고 있으니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도 하다.
노조 없이 성공한 초일류 기업은 삼성 말고도 많다. 2011년 미국 포천지가 ‘10대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한 애플, 구글, 버크셔해서웨이, 아마존닷컴, 페덱스, 마이크로소프트 등 6개가 비노조 기업이다. IBM과 델에도 노조가 없다. 이들 기업에는 ‘노동운동으로 급여를 올리기보다 자기 계발로 몸값을 높이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있다. ‘노조가 경영권을 견제해야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론은 이들 기업의 실적 앞에 무력해진다.
비노조 경영의 그늘도 있다. 올해 초 몰아친 쇄신 태풍에 삼성의 많은 임직원이 별 저항도 못하고 옷을 벗었다. 노조가 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직원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 노동계가 삼성을 ‘정글 자본주의의 집약체’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노동계는 삼성의 비노조 벽을 허물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해 왔다. 7월 복수노조 허용에 앞서 민주노총은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해 ‘삼성 공략’을 준비했다. 그 결과물이 18일 설립된 ‘삼성 노조’다. 노동계는 ‘삼성에 진성 노조가 처음으로 생겼다’고 평가했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노조원은 삼성에버랜드 직원 4명뿐이었다. 부위원장은 기밀 유출 혐의로 징계 해직돼 노조원 자격을 잃을 처지다. 그는 훔친 자동차에 위조 번호판을 달고 다닌 혐의로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그 바람에 삼성 내부에서는 ‘방탄 노조’라는 말까지 나왔다.
때마침 부위원장의 의혹이 드러나자 노동계는 ‘탄압’이라는 주장을 폈다. 주도자의 비위를 들춰내거나 친기업 노조를 내세워 교섭권을 무력화하는 게 삼성다운 방법이라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삼성노조’의 성공은 노조에 대한 구성원의 공감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누구를 위한 노조냐”는 말이 나와선 안 된다. 순수성이 결여된 파괴적 노동운동으로는 ‘직원을 최고로 대접한다’는 경영 철학을 결코 허물 수 없다. 삼성의 노조 설립은 한바탕 소동으로, 또 하나의 실패사(史)로 기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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