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평범한 자존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5일 03시 00분


“기적은 이미 일어났지. 집안 학벌 외모 뭐 하나 해당 사항 없는 여자가 나같이 부러울 것 없는 남자의 김태희이고 전도연인데.”

“이젠 좀 본인의 안목을 믿지그래.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김주원이란 남자가 매달릴 만한 여자거든.”

“이봐 이봐, 이러니 내가 안 반해.”

요즘 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얘기가 안 통한다는 ‘시크릿 가든’에서 남녀 주인공이 닭살 돋게 주고받는 대사다. 재벌 3세와 평범한 여자의 사랑, 서로의 영혼이 바뀌는 흔하디흔한 설정에도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엔 맛깔 나는 대사, 연기자들의 호연 등 여러 요인이 있겠다. 그중에서도 여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데 묘미가 있다. 단지 재벌 3세라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서가 아니다. 앞에 소개한 대사처럼 집안 학벌 외모 없는 평범한 스턴트우먼이지만 자존심을 전혀 굽힐 필요 없이, 아니 오히려 팍팍 살리면서 백마 탄 왕자님을 사귈 수 있다는 게 평범한 여성 시청자들에겐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상황인 것이다.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여자 주인공을 찾아와 헤어지라고 하며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것’ 운운할 때도 여자 주인공은 쏘아붙인다.

“김주원 씨, 저 좋아합니다. 저도 김주원 씨 좋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 죽어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제 부모 욕보이면서까지 죽어도 못 잊을 그런 남자 아닙니다. 그럴 가치 없습니다.”

최근 끝난 드라마 ‘대물’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여성이 우연히 정치판에 들어가 정치권의 갖은 압력과 회유에도 기죽지 않고 자존심과 원칙을 끝까지 지키면서 결국은 대통령까지 오른다는 줄거리는 남자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다.

둘 다 비현실적인 드라마여서 현실에선 저런 자존심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 국민은 자존심이나 체면 세우는 일에 물불 안 가리는 경향이 심하다.

최근 한 민사소송 조정위원에게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소송 얘기를 들었다. 복잡한 사실관계는 다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세입자의 하소연이었다고 한다. “나이도 어린 집주인이 한 번도 내 말을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 결국 집주인이 그 부분을 정중히 사과하자 소송이 끝났다고 한다.

최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민귀군경’(民貴君輕)도 바꿔 말하면 위정자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국민의 자존심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뜻이리라. ‘시크릿 가든’처럼 평범한 자존심을 살려줄 줄 알아야 인기도 끌고 열혈 팬도 생긴다. 경제와 복지가 평범한 장삼이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한다면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건 정치의 몫이다. 부모가 허구한 날 싸움질이나 하고 서로 가시 돋친 욕설만 퍼붓는 집에선 아이들이 자존감을 키울 수 없다. 자기 비하와 저항감만 늘 뿐이다. 새해가 된 지 닷새밖에 안 됐지만 여야가 상대에게 밀리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 살리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지난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의 자존심만 멍들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또 하나. 우리들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선 남의 자존심부터 세워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존심을 세워주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자존심을 세워주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자존심을 세워주고….

서정보 교육복지부 차장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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