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흑백TV, 컬러TV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9월 14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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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회화의 역사는 선(線)과 색(色)의 논쟁사였다. 18, 19세기 파리가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이탈리아발(發) 고전주의의 ‘윤곽 우선주의’와 네덜란드 등 북유럽의 ‘색채 중심주의’는 일견 화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형태와 색채의 긴장은 지금도 여전하다. 색의 재료를 구하기 위한 화가들의 노력도 지난했다. 청색 안료가 대표적이다. 예전엔 시간이 지나도 색이 변치 않는 청색 안료는 ‘울트라마린’ 하나뿐이었다. 보석의 일종인 아프가니스탄산(産) 청금석을 갈아 만든 것으로 같은 무게 황금의 1.5배 가격이었다.

흑백TV만 보겠다는 사람들

16세기 초에야 코발트가 함유된 유리를 빻아 만든 ‘에메랄드그린’이 대용품으로 나왔고 18세기 초엔 싸지만 독성이 강한 ‘프러시안블루’가 발견됐다. 19세기 초 드디어 화학적 공정으로 ‘코발트블루’가 제조됐고 20세기 초엔 그 비싸던 울트라마린까지 합성됐다. 독성 없고 착색력 내구성이 좋으며 값싼 안료에 대한 탐색은 지금까지 계속되는데 작년 11월엔 미국 오리건주립대가 망간산화물 청색 안료를 발표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시대마다 사용된 물감이 다르기 때문에 안료 분석을 통해 그림의 연대측정이 가능하며 이는 위작(僞作)을 골라내는 결정적 단서가 되기도 한다.

화가들이 색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풍부한 색조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색채에 대한 묘사 없이는 세상을 제대로 담아낼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한때 흑백TV로 세상을 봤지만 이제 달리 대안이 없는 경우에만 흑백모니터를 쓴다. 흑백사진 역시 특별한 용도에만 쓰인다.

그렇지만 세상을 무채색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고도 색맹인 이들은 만사를 검은색-회색-흰색의 구성으로 파악한다. 좌와 우, 진보-보수라는 이념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자들이다. 뭘 보든 ‘좌로 몇 클릭, 우로 몇 클릭’인지 센다. 색입체(色立體·색채피라미드)에서 가운데 딱 한 줄뿐인 명도에만 집착할 뿐 색상 및 채도의 풍성함에는 무심한 것이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내 편, 네 편만 따진다고 해서 진영논리라고도 한다.

사물을 흑백영상으로 보는 것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새까맣거나 새하얗지 않으면 회색분자로 몰아붙인다. 나아가 아예 세상을 검거나 희게 칠하려 든다. 만에 하나, 이 기도가 성공한다면 명암으로 표현된 흑백사진 속의 형체마저 뭉개질 것이다.

기자는 미국의 버클리캘리포니아대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머문 적이 있다. 당시 마틴 루서 킹 휴일이 다가오자 두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정확하게는 해당 시교위)에서 이 법정공휴일의 취지를 알리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무지갯빛 세상을 향해

“킹 목사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다 희생된 분입니다. 그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없애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피부색뿐 아니라 남녀, 빈부, 종교, 인종, 가족 구성, 성적(性的) 취향 등 각종 이유로 인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기념일의 정신을 새겨 자녀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도록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공무원이 학부모들에게 ‘성적 취향에 따른 편견까지 경계하라’는 편지를 보내오다니…. 일곱 빛깔 무지갯빛 세상을 꿈꾸는 미 서부인들의 ‘열린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이는 또한 7월 중순부터 지난 주말까지 25회, 33개 지면에 걸쳐 연재한 ‘대한민국, 공존을 향해-통합을 위한 동아일보의 제언’ 특집의 기획 취지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고민을 거듭한 후 제작된 시리즈이지만 몇 점 기사가 어찌 세상을 바꾸겠는가. 다만 관용과 화해, 소통과 통합, 상생과 공존의 물꼬를 트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10년쯤 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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