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해병,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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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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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부대 상관에게 성추행당한 뒤 정신적 충격으로 민간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해병대 병사에게 해병대사령부가 ‘1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탈영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해병 제2사단 본부대대 운전병 이모 상병은 7월 사단 참모장에게 성추행당했다. 참모장은 병사의 하의를 벗기고 성행위를 시도하다 잘 안 되자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4차례 같은 행위를 했다.

현재 피해자 상태는 심각하다. 남자의 신체가 닿거나 군용품을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작까지 한다. 수치심으로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성추행 때문만이 아니다. 사건이 불거지자 그 참모장은 피해 병사에게 자신의 권총을 보이면서 “군에서 자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느냐. 너도 죽을래”라고 위협하며 비밀 유지를 요구했다고 병사의 가족들은 전한다. 성추행 사실이 알려지자 본부 대대장과 부사단장은 병사와 가족들에게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없던 일로 하자”며 은폐를 종용했다.

트집 잡듯 피해자 괴롭히기

군은 치료를 위해 병사에게 42일간의 휴가를 줬다. 하지만 이 휴가는 1일 오후 8시에 끝난다. 병사의 가족들은 “민간병원에서 계속 치료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지만 해병대는 요지부동이다. 치료가 필요하다면 국군병원에서 치료하라는 것. 이 상병은 “군에서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 같다”며 병실 구석에 앉아 울고 있다. 병사의 가족들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지금 돌아오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한다. 병사의 주치의도 “지금 복귀하면 증상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며, 자해·자살 시도 우려도 있다”는 의견이다.

관련 법규정은 어떻게 돼 있을까. 군인복지기본법 시행령(대통령령) 10조 2항은 ‘국방부장관은 군 의료기관의 인력이나 장비 등으로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없는 경우 등 민간의료기관에서 치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치료를 민간에 위탁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군복을 보면 발작하는 이 병사가 바로 그 경우다.

하지만 해병대사령부나 국군병원의 견해는 다르다. 국방환자관리 훈령(국방부장관 훈령) 44조 1항은 ‘위탁치료의 범위’를 ‘군병원 진료능력이 초과되어 군병원장이 민간의료기관에 위탁한 환자’ 등으로만 정하고 있으므로 “정신과 의사가 3명이나 있는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해병대를 믿고 지원할까

장관 훈령은 상위법령의 취지에 맞게 제정되고 해석돼야 한다. 이 훈령은 위탁치료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열거해 상위법의 입법취지를 훼손하고 있다. 일종의 입법오류다. 실제 병영 현장에서는 병사가 다치면 본인과 가족이 원할 경우 민간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최대한 편의를 제공한다. 하지만 해병대는 반대다. 마치 트집 잡듯 피해자를 괴롭히고 있다. 비유하자면 회사 자동차로 직원을 치어놓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직원에게 ‘출근 안 하면 징계하겠다’며 사규를 들이대는 악덕 기업주 같다.

법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가해자와 그를 두둔하기 위해 병사를 협박하는 등 권한 남용의 죄를 범한 지휘관들’ 대(對) ‘피해 병사’. 누가 엄정한 법적용을 받아야 하며, 누가 배려받아야 하는가. 꼭 법해석을 거론할 것도 없다. 이는 ‘사람의 도리’에 관한 문제다.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해병대는 지원제다. 필시 그 병사도 자랑스럽게 지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병대는 그렇게 지원한 병사를 그리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 이래서야 지원이 계속될지 참 걱정이다.

지금 해병대가 진짜 해야 할 것은 상처 입은 청년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치료, 배려와 배상이다. 해병의 명예에 먹칠한 사람들을 엄벌하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가 대신 부담한 비용에 대해 가해자에게 구상(求償)하는 등 같은 일이 절대 재발하지 않도록 튼튼한 쐐기를 박는 일이다.

대한민국 해병, 정녕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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