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손택균]관객 63%가 추천거부한 자칭 ‘웰 메이드’ 잔혹영화

  • Array
  • 입력 2010년 8월 18일 03시 00분


최근 서울 한 극장에서 원빈 주연의 영화 ‘아저씨’를 보고 나온 윤진혁 씨(27)는 혐오감 때문에 구역질까지 하는 여자친구를 달래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하지만 두 관객이 그날 겪은 불쾌감은 영화 제작에 관여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인원수’만이 15일까지 관객 수 236만 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으로 국내 흥행 1위를 달린 흥행 성적표에 반영됐다.

국내 최대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아저씨’에 이어 또 다른 메이저 배급사 쇼박스가 지난주 ‘악마를 보았다’를 선보였다. 두 영화는 모두 시퍼런 회칼로 사람 몸을 난자하는 장면이 수없이 이어지는 잔혹한 액션물이다. 시사회장에서 만난 CJ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근래에 보기 드문 감성적 액션영화”라며 뿌듯해했다. 잔인한 살해 장면 때문에 개봉 전 등급 판정 논란을 겪은 ‘악마를 보았다’의 김지운 감독은 “최종 판단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 ‘악마를 보았다’는 ‘아저씨’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랐다.

영화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 제작진 등 관계자들은 흔히 “관객 평가에 맡기자”고 말한다. 초반에 괜찮은 흥행 성적이 나오면 “일부 혹평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는 식으로 홍보한다. 멀티플렉스를 하나의 영화로 도배하다시피 해 관객의 선택권을 빼앗은 사실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13∼15일 서울 경기 15개 극장의 ‘악마를 보았다’ 상영관 출구에서 만난 관객 236명은 영화사가 내세우는 ‘흥행 성적’에 어떤 허수(虛數)가 있는지 보여줬다. ‘이 영화를 가족이나 친구에게 권하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63%는 ‘추천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기타 응답자를 뺀 34%만이 ‘추천하겠다’는 답을 택했다.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대개 “너무 상세히 묘사한 살해와 강간 장면이 불쾌하고 혐오스럽다”는 것이었다.

유명 영화감독이나 제작자가 자기 영화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하는 관객을 대면할 기회가 있을까. 그들도 관객을 만나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제나 시사회의 ‘관객과의 대화’ 이벤트에서 마이크를 들고 일어나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관객은 보기 어렵다. 부정적 평가는 ‘편협한 일부 의견’이라 생각해 점점 외면하기 마련이다.

수십억 원을 들여 찍은 자칭 ‘웰 메이드 대작’이 거듭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뒤에도 잊지 못하겠구나’ 싶을 만큼 진한 감동을 건넨 한국영화를 만난 기억은 아득하다. 지금 한국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관객이 차지한 자리는 얼마나 될까. 좋은 흥행 성적을 관객의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오해만이라도, 거둬 주길 바란다.

손택균 문화부 soh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