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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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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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파 이경윤, 고사탁족도(부분)
낙파 이경윤, 고사탁족도(부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면 절로 탁족도(濯足圖)가 떠오릅니다. 탁족도란 강이나 계곡의 물에 발을 담근 선비나 은사(隱士)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한 사람인데 유독 두 사람이 등장하는 탁족도가 있습니다. 낙파 이경윤(駱坡 李慶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입니다.

이경윤은 조선 중기 화단에서 산수인물화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입니다. 그가 그린 고사탁족도의 중심에는 시냇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윗옷자락을 풀어헤쳐 불룩하게 배가 나온 인물이 다리를 꼬고 앉아 물에 발을 담근 모습이 보입니다. 옆에 술병을 받쳐 든 동자가 서 있습니다. 탁족과 술이 만나는 지점, 여기에 고사탁족도가 보여주는 우리 선조의 그윽한 풍류와 여유가 숨어 있습니다.

선비가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다는 건 격식과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맨발을 물에 담근다는 것은 ‘몸을 닦는다’는 수신(修身)의 의미가 내포돼 있어 휴식 중에도 곧고 맑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선비정신을 반영합니다. 고사탁족도는 여기에 술을 보태 더욱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 진정한 피서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세상은 피서 하면 끔찍스러운 도로 정체, 인산인해의 바다, 바가지 상혼 따위가 먼저 떠오릅니다. 계곡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영양탕 추어탕 닭백숙 같은 보신 풍경이 먼저 떠올라 머리를 흔들게 만듭니다. 우리 조상이 피서 장소로 즐겨 찾은 곳이 산과 계곡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과 계곡, 탁족과 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는 풍경인데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왠지 어색한 ‘그림의 떡’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산과 계곡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자연에 동화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탁족의 계곡이 보신의 계곡으로 변했으니 말해 뭣하겠습니까. 운치 있는 또 다른 피서법으로 책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에서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신적인 집중으로 외부의 무더위를 잊는 방법입니다. 실제로 한여름은 밤도 짧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어느덧 날이 밝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1년 사계 중 한여름의 무더위는 사람을 지치고 흐트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현대의 피서를 1년 중 가장 방만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기회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무더위가 우리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건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여유를 회복하고 자연의 리듬에 심신을 맞추라는 내밀한 각성의 메시지를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은 그것을 알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자세로 탁족의 여유를 즐겼던 것입니다. 거기에 술과 책까지 가세했으니 한여름의 무더위가 어찌 즐길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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