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15일 오후 9시 45분경, 쿠바의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메인함이 폭침됐다. 미군 병사 258명이 사망하고 96명만이 살아남았다.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반인륜적인 식민정책에 신음했고 미국은 쿠바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메인함은 쿠바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참사를 당했다. 1941년의 진주만 기습과 2001년의 9·11테러를 제외한다면 메인함 폭발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평시 참사였다.
메인함 폭침 뒤 새 길 개척한 美
미국인은 즉각적으로 스페인의 소행이라고 외쳤다. 정확한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스페인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객관적인 진상규명을 기다리자는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국민은 매킨리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웠다. 결국 여론에 밀린 매킨리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과 이민 문제, 관세논쟁, 보스정치로 분열된 미국 사회는 ‘스페인 타도’의 외침 속에서 극도의 일치감을 맛보았다.
천안함 폭침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는 일치단결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숙한 시민정신을 보여줬다. 스페인에 보복전쟁을 벌였던 미국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질병만으로도 약 5200명의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참담한 모습을 목도하면서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결과를 기다렸다. 정부는 민군 합동조사를 통해 천안함 폭침사건 원인에 대한 국제적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먼저 국민과 정치권은 북한의 군사도발을 객관적 사실로 확인하고 모든 대책논의와 행동을 이에 근거하여 모색해야 한다. 군사적 및 비군사적 응징 가능성 검토는 물론이고 안보개념의 재정립, 국방정책의 전면적 재검토, 비대칭 전력의 대응책 및 새로운 군사외교전략 모색도 엄정한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말뿐인 책임론만 거론하지 말고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국가 안위를 위한 건설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성과 현실성에 근거하지 않는 논리는 자기기만과 사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과 정치권은 천안함 폭침사건을 일회성의 단순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인 국가위기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소극적 방어 위주의 국방전략과 국가안보시스템의 결함 때문만도 아니다. 근대 이후 국가권력의 신수설(神授說)이 부인되면서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국가 그 자체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나라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이고자 하는가. 이 물음은 반공국가이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 그 이상을 요구한다. 북한뿐 아니라 글로벌 시대의 경쟁·협력국가와의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책임 있는 국가의 지속가능한 비전은 어떠해야 하는가. 거시적이며 총체적인 국가 정체성의 정립과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천안함 사건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침사건으로 재현될 것이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합의 구할 때
마지막으로 우리는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거대세계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은 메인함 사건으로 시작된 스페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보호령으로 취하는 세계패권국가의 길을 열었다. 우리도 제국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가 발전적 국가 정체성을 통해 한민족의 글로벌 디아스포라를 통합하고 다양한 층위의 미래전략을 토대로 지구사회를 상생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때 북한까지도 포용하는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원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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