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롤모델이 사라진 졸업식

  • 동아일보

새로운 희망을 안고 교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의 축제인 졸업시즌이 마무리되고 있다. 알몸 졸업식 뒤풀이 등 일부 학생의 일탈로 올해 졸업 시즌은 유난히 짙은 씁쓸함을 남겼다. 달라진 풍속도를 궁금해 하던 차에 최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딸아이의 졸업식을 찾았다. 예전처럼 눈물바다를 연출하는 광경은 물론 졸업식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학생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이보다 학부모들을 씁쓸하게 했던 것은 학교 측에서 마지막 순서로 준비한 선배들의 동영상 축하 메시지였다. 여러 직종의 선배들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0명 가까운 축하 메시지의 주인공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아이돌 가수와 예능인 등 연예계 인사였다. 어린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학부모들은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줄 사람이 연예인밖에 없냐”는 불만에서부터 “저러니 중고등학교에 올라가 별 희한한 졸업식 뒤풀이를 하는 것 아니냐”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모든 학교의 졸업식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흥겨운 축하무대를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고민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여러 분야의 롤모델(Role Model·역할모델)을 제시하면서 학생들의 꿈을 키워줘야 할 학교에서 ‘스타 증후군’만 부추긴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문득 예전에 전해들은 영국 교사·강사협회(ATL)의 노력이 이날 장면과 오버랩됐다. 이 협회는 2008년 청소년의 장래 포부와 희망을 왜곡하는 스타 증후군의 문제점을 강도 높게 지적하면서 대중매체가 평범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롤모델을 많이 소개하도록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진출을 꿈꿀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게 영국 교사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면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초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장래희망 조사를 보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주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학생들은 교사와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종과 화려하게 비치는 연예인을 최고의 선호 직종으로 꼽았다. 안정성과 화려함의 양 극단을 추구하는 틈바구니에서 정작 사회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될 다른 소중한 꿈들이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공계 기피 현상이 나오는 원인 중 하나로 교육 과정에서 이공계 직종의 롤모델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꿈들이 하나둘씩 사그라지는 것은 결국 한국의 미래와도 직결되어 있다. 고도 성장기를 벗어나 잠재성장률이 3%대까지 떨어진 우리로선 기댈 곳이라고는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희망을 키워가고 도전해가는 인재들뿐이다. 이런 인재들을 키우려면 학창 시절부터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보여주고 미리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助力者)로서의 스승의 존재가 절실하다. 다양성과 창의성이 미래의 부(富)를 결정하는 시대에 점차 획일화되어 가는 학생들의 꿈은 한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교육 일선에서 이끌기를 멈추는 순간 한국호(號)도 함께 서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졌으면 한다.

박현진 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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