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선미]“명품 막걸리 만들고 싶지만…” 대기업의 딜레마

  • 동아일보

“우리는 국가대표급 명품 막걸리를 그 누구보다 잘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CJ그룹 고위 관계자의 말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의 유별난 한식 사랑 속에 지난해부터 막걸리 개발에 매달려 최근 시제품을 완성했다. 간장, 된장을 만드는 이 회사의 발효 기술로 트림까지 없앤 명품 막걸리란다. 올해 CJ가 해외에 야심 차게 내는 비빔밥 체인점 ‘비비고’에서 팔고 싶다는 술이다.

그는 말했다. “딱 한 가지가 걸려 막걸리 시판에 대한 최종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요.” 그 딱 한 가지는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에까지?’라는 부정적인 시선이다. 이 관계자는 “직접 막걸리를 생산하지 말고 중소 양조장 막걸리의 유통만 맡아 달라는 정부 측의 제안이 있었다”며 “전국 막걸리 명인들에게 우리의 발효 기술을 알려주고 판매를 대행할까도 검토했지만 직접 술을 빚어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장규 하이트-진로그룹 부회장도 지난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막걸리 시장이 탐나긴 하는데, 대기업 진출에 대한 여론 때문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서민용 막걸리가 아닌, 수출용 고급 전통주를 만들겠다고 애써 강조했다. CJ나 하이트-진로나 대기업들은 여건만 허락하면 언제라도 막걸리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준비를 갖췄다. 이제 국내 막걸리 시장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이들에게 ‘출발’ 구령을 내리느냐는 것, 구령이 없더라도 대기업이 ‘인정사정없이’ 내달리느냐는 것이다.

국내 막걸리 시장은 갑자기 ‘떴다’. 지난해 말 가요대상이나 방송대상처럼 국내 주류대상을 뽑았다면 대상, 못해도 신인상을 줄줄이 거머쥐었을 것이다. 지난해 3000억 원 규모였던 국내 막걸리 시장은 2012년 1조 원 시장으로 성장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국내 업체 중 상당수는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다. 지난해 11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전국의 전통주 업체 60곳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주 업체의 38%가 연 매출 1억 원 미만이었다. 그중에서도 막걸리 등 탁주업체의 평균 자본금 규모는 4779만 원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탄탄한 자본력과 유통망을 갖춘 대기업이 진출하면 막걸리의 명품화가 한결 빨라질 수 있다. 세계 다른 명주들과 겨루는 조건이 좋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막걸리를 빚어온 지역 토종 중소업체들이 고사할까 염려된다. 대기업과 중소 상공인의 발전적 상생모델이 시급한 곳, 막걸리 시장도 그중 하나다.

김선미 산업부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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