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일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다음 날로 예정된 KB금융지주 회장추천위원회(회추위)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지금 사외이사제도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회장 선임을 그 이후로 연기해 달라”는 것. 경쟁자 2명이 사퇴한 마당이니 단독후보로 남은 강 행장마저 물러나라는 장관급 위원장의 압박이었다.
당국,KB경영성과 타박자격 없다
하지만 강 행장이 이를 거절하고 회장 내정자로 선출되자 금융감독원은 16일 KB금융과 국민은행에 대해 예정에 없던 검사를 돌연 시작했다. 명목은 ‘1월 중순 예정된 종합검사의 사전조사’였지만 본검사를 몇 배 능가하는 초고강도였다. 초점은 ‘행장 등의 개인비리 캐기’에 맞춰졌고 행장 운전사까지 불러 조사했다.
검사가 엉뚱한 방식으로 진행되자 강 행장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회장 선임을 강행할 경우 당국이 앞으로 KB금융을 얼마나 괴롭힐지 훤히 보였던 것. “그런 상황이 KB와 주주, 고객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사퇴를 결심했다. 당국의 완승이었다. 비록 반칙승이었지만….
금감원은 “일상적인 조사였을 뿐” “강 행장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그 말을 곧이들을 바보는 없다. 당국자들도 금융권 사람들이 그 말을 믿기를 내심 원치 않을 것 같다. ‘관치금융이 사라졌다’고 오판한 채 정부 의도를 거스를 경우 어떤 무서운 결과가 빚어지는지 새삼 깨닫고 옷깃 여미기를 기대할 것이다. 실제로 신한, 하나 등 ‘1인자 지배’가 오래된 은행들은 표정이 얼어붙었다.
은행연합회는 이달 중 사외이사 제도에 대한 모범규준(Best Practice)을 발표한다. 강 행장에게 말한 ‘제도개선 작업’의 결과물이다. 당국은 법규가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자율규범을, 그것도 사외이사의 선임절차 등에 관한 것을 핑계로 이번 일을 벌인 것이다.
필자와 만난 당국자들은 “지난 5년간 강 행장이 한 일이 뭐 있느냐”고 했다. KB에 검사 나온 조사역도 같은 얘기였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다. 성과 없는 경영진을 교체하는 것은 지분 하나 없는 정부가 아니라 주주들 몫이다. KB금융은 외국인 지분이 58%다. 그중 최대지분을 가진 ING는 주주대표로 회추위에 참석해 강 행장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미국의 주총안건 분석전문기관인 ISS도 ‘강 행장에게 찬성’ 의견을 내놓았다. 삼성투신운용 등 국내의 재무적 투자자 20개사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이들 주주의 권리를 짓밟을 권한을 누가 금융위원장에게 주었는가.
더욱 가소로운 것은 금융당국이 경영성과를 타박하는 대목이다. 국민은행이 정부 손에 있을 땐 가계금융만 했다. 글로벌 경쟁은 엄두도 못 내던, 크고 굼뜬 초식공룡이었다. 그 은행이 민영화 이후 국내 최대 금융사로 성장했다.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할 정도가 됐다. 거꾸로 당국자들에게 묻는다. 이 은행이 리딩뱅크로 발전하는 데 당신들 한 일이 뭐 있는가.
금융규제이론 다시 공부하라
금융업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규제의 이론적 근거가 탄탄하며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금융의 공공성에 따르는 건전성 규제다. 행장 등 경영진에 대한 자격기준도 필요하지만 ‘적법하게 선출된 내정자라 해도 맘에 안 들면 주저앉힐 수 있다’는 뜻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12월 대통령에게 “금융을 선진화하겠다. 해외투자가들에게 한국 금융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심겠다”고 새해 업무보고를 했다. 그러나 그 직후 대외 신인도에 먹칠하는 일을 했다. 거짓 보고한 셈이다.
이제 와서 강 행장의 회장 선임을 재추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관치 행태는 돌려세워야 한다. 대통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곧 G20 정상회의를 열 나라에서 ‘진동수류(流) 관치를 방치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곳은 이제 청와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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