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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8월 14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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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경, 무심코 일본 TV채널을 돌리다 고교야구 선수들이 열을 맞춰 행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과 무릎을 90도로 들어올리며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불현듯 고교 시절 교련 시간의 그 지겨웠던 제식훈련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묘한 ‘향수(鄕愁)’가 느껴져 눈을 떼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일본 최고 고고야구 경기인 고시엔(甲子園) 대회의 개막식이었다. 일본 국영 NHK 방송은 고시엔 대회 개막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했다. 일본에 사는 지인은 아직도 고시엔 대회 때가 되면 일본 열도가 들썩거릴 정도로 고교야구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길 듣는 순간 또 다른 향수가 밀려왔다. 고교야구!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5학년 때 본 제26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의 결승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해, 그러니까 1972년 대회 결승에서 군산상고는 부산고와 맞붙었다. 군산상고는 9회초까지 부산고에 1-4로 끌려갔다. 그리고 9회말. 기적 같은 역전승이 벌어졌고, 온 나라가 들끓었다.
1975년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전은 또 어떤가. 경북고와 맞붙은 광주일고의 4번타자 김윤환은 국내 고교야구 사상 처음으로 3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너나없이 풍족하지 못했던 1970년대. 고교야구가 만든 감동의 드라마는 월드컵 4강 진출 때 못지않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랬던 한국 고교야구 열풍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일본은 지금 8·30 총선 정국이다. 삿포로 인근을 여행하면서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의 선거 포스터와 마주쳤다. 포스터엔 하토야마 대표의 얼굴 사진 옆에 세로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政權交代(정권교대)’
정권교체(政權交替)가 아니라 정권교대였다.
‘교체’는 ‘사람·사물을 다른 사람·사물로 바꾼다’는 뜻이고, ‘교대’는 ‘어떤 일을 차례에 따라 맡는다’는 의미다. 총선 결과에 따라 그때그때 정권이 바뀔 수 있는 의원내각제의 일본에선 정권교체보다 정권교대가 적합한 용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선 1955년 창당 이후 반세기 넘게 제1당의 위치를 지키며 전후 일본정치를 사실상 지배해온 자민당 우위체제가 처음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마당에 ‘정권교대’라는 슬로건은 어쩐지 싱겁게 느껴졌다. ‘교대’라는 단어 속에 교체돼 물러나는 이들도 존중하는 일본식 전통이 배어 있다면 억측일까.
이번 여행 중 일본에서 만난 한 외교관의 머리카락이 몇 달 전 서울에 있을 때와 달리 반백으로 변해 나를 놀라게 했다. 한국에서 하던 염색을 하지 않았다나. 아직도 장로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는 일본에선 흰머리가 외교에 유리하다고 했다.
사실 일본인들이 웬만해선 옛것을 바꾸지 않는 데 대해 일본 내에서도 양론이 있다. 그래서 이번 총선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대입제도를 갖고도 내년 대입제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사회, 새로 조성한 광화문 광장에서만큼은 시위를 막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이 사회, 마침내 민주주의의 보루인 다수결 원칙마저 무너지려는, 이 예측불허 럭비공 사회에 사는 나로선 구닥다리 같지만 예측 가능한 토양에 사는 그들이 부러웠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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