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맞선 40년 동지여, 편히 잠드소서

  • 입력 2008년 12월 20일 02시 59분


오봉 이중재 고문을 추모하며

오봉 이중재(晤峰 李重載) 고문의 부고를 접하고 충격과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오봉과 나는 15대 국회를 끝으로 함께 의정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무릎을 맞대고 우국의 충정을 나누던 절친한 동지였다. 더욱이 금년 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 운동을 같이하며 건강을 다지던 가까운 벗이었다. 근래 건강에 이상이 와 투병 중이었지만 그 불굴의 의지로 반드시 일어나리라 믿었기에 비보를 접하고 애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되돌아보면 오봉과 나는 40년 넘는 정치역정의 상당 부분을 공유해 왔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개발독재로 치달을 조짐이 농후하던 공화당 정권에 맞서 야권 후보 단일화의 국민적 여망이 고조되었다. 이에 부응하고자 당시 야권의 큰 지도자들이었던 윤보선 유진오 이범석 백낙준 선생이 모여 이른바 ‘4자회담’을 열었다(1967년 1월 26일). 이때 오봉은 유진오 당수를 모시고 있던 민중당의 대변인으로, 나는 윤보선 선생이 총재였던 신한당의 대변인으로서 이 역사적 자리에 함께 배석해 제반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데 미력을 보태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정치사적으로 총체적 부정선거로 규정되고 있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의 피해자였던 오봉은 천신만고 끝에 1968년 전남 보성-벌교 보궐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나는 동료 의원들로 구성된 부정선거감시단을 이끌고 선거기간 내내 지역에 상주하며 고인을 도왔고 사필귀정의 승리에 감격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또 1980년 5·17군사변란으로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정치 규제에 묶여 공민권을 박탈당했던 오봉과 나는 1985년 나란히 신한민주당 부총재가 되어 2·12총선의 ‘신당 돌풍’을 일으키는 데 힘을 합친 바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장으로 일할 때도 오봉은 국회의 원로 중진 의원으로서 늘 원숙한 고견과 기탄없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나의 동료였다.

고인은 명석한 논리와 대쪽 같은 기개를 지닌 선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갖춘 덕인이었다. 또 한평생 본인의 원칙과 소신을 결코 저버린 적이 없는 신의와 의리의 정치가였다.

어느덧 2008년도 끝자락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금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인 뜻깊은 해이다. 지난 60년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와 혁명의 상흔을 딛고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 성취와 중흥의 역사 속에는 평생을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와 올바른 경제의 구현을 위해 헌신해 온 오봉의 땀과 눈물이 짙게 배어 있음을 나는 감히 확신해 마지않는다.

오봉 이중재 동지여! 편히 잠드소서.

김수한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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