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시민 권력과 거버넌스

  • 입력 2008년 6월 25일 02시 58분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가 식탁에 오르지 않게 되었는데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 58.5%가 ‘그만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계속해야 한다’는 응답도 35.5%나 됐다. 미국과의 추가협상과 청와대 비서진 및 내각 개편으로 쇠고기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인데도 시위는 소수 참여자들에 의해 더 과격해지는 추세다. 촛불시위에도 이른바 운동을 위한 운동이라는 ‘자기목적화’ 패러독스가 나타나는 것인가.

투표는 안해도 시위 적극적인 시민

시민운동이건 정치운동이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운동이다. 따라서 문제가 해결되면 운동은 소멸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운동은 소멸하는 대신 존속 자체를 목적으로 변질된다. 다른 의제를 부각시키거나 내부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이 그런 경우다. 광우병 쇠고기의 호소력이 떨어지자 공기업 민영화 반대나 ‘미친 교육’ 반대가 촛불시위 의제로 등장한 것처럼.

물론 운동 없이 사회변혁은 없다. 촛불시위가 없었으면 쇠고기 추가협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흔들 정도로 시위가 계속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떻게 해야 촛불을 끌 수 있을까? 촛불시위에 대한 올바른 성격 규명부터 해야 한다.

이번 촛불시위의 의제는 지금까지의 어떤 시민운동과도 달랐다. 반미 정서에 불을 붙인 여중생 사망사건이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와 비교해도 그렇다. 시민을 거리로 불러낸 것은 탄핵이나 한미관계 등 거창한 정치문제가 아니라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위는 생활정치(life politics)의 성격을 띠고 있다.

흔히 생활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프랑스 68혁명을 꼽는다. 68혁명은 일상생활에서의 문화적 저항이 드골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바뀐 사례다. 68혁명은 한 대학교의 남녀 대학생 기숙사 혼숙문제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혁명의 시작치고는 미약한 주제였다. 당시 혁명 구호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상상력에 권력을!’ ‘절대 일하지 마시라’ 등이었다. ‘드골 물러가라’는 구호는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68혁명처럼 시위 의제가 자신들의 삶과 관련됐다고 여겨질 때 폭발력은 커진다. 이번 시위도 출발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됐지만 경쟁과 효율, 성과를 강조하는 정부로 인해 내 삶의 질을 훼손당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경고가 담긴 것으로 봐야 한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도 대의민주주의는 제도화됐지만 발전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율 하락 때문이다. 지난해 대선 투표율은 63%, 올해 총선 투표율은 46%였다. 투표율 하락은 정치 불신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왜 공휴일에 빈둥빈둥 놀면서도 투표장행(行)은 마다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거리시위엔 나서는 것일까? 정치가 국민생활과 따로 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부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민주당이 장외투쟁이란 명분으로 거리를 헤매는데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시민의 불신 대상에 정치권력인 야당 또한 포함돼 있는 까닭이다.

촛불의견 수렴할 장치 갖춰야

현대의 시민은 통치 대상으로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4년 혹은 5년 만에 한 번 하는 투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마을에서 직접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정부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 참여를 활성화하는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governance)를 상시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대의제의 근간을 흔들 정도여서는 안 된다.

거버넌스란 이해관계자들의 상호협의 체제를 말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정부 역할이 전통적 통치자가 아니라 관리자이고 협력자여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은 거버넌스를 통치(統治)에 빗대 협치(協治)라고 번역한다. 우리에겐 낯선 용어지만 의미는 잘 살린 것 같다. 역설적이지만 촛불을 끄려면 촛불을 통치과정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