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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4월 2일 19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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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나 발칸반도의 예에서 보듯이 정치 경제 사회적 국경이 모호해질 때에도 작용하는 것은 언어 종교 음식 역사 등 문화적 요소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TV 컴퓨터 등 통신망과 청바지 코카콜라 등 상품, 특히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음악 같은 문화상품들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의 세계화는 더 깊이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이미 상당부분 서양문화에 동화돼 있는데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우리의 언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가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것일까? 무엇을 물려주면 문화적 국경, 예를 들면 음식 종교 언어 역사가 결국 무너져 갈 때 우리 아들들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과 연결시켜 줄수 있을까?
여러 사람들과 이런 얘기를 하다가 ‘정성스러움’이 매우 소중하고도 우리다운 가치 혹은 덕목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성 성(誠)’자로 요약되는 이 개념은 아닌게 아니라 선조들의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고 또 오늘까지도 살아서 우리를 움직인다.
한국 기독교가 가진 독특한 전통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새벽기도회다. 이것은 분명 2천년 기독교 전통에서 온 것도, 2백년 혹은 1백년 전 천주교나 개신교가 한국에 전파될 때 들어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새벽 일찍 정한수를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빌던 조상대대의 기도 전통이 기독교로 들어온 것이다. 이 기도 전통이 얼마나 살아 있는 것인가는 입학시험 때 수험장 앞에서 기도드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모습은 정성과 치성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TV의 음식광고가 또 다른 좋은 예다. “음, 바로 이 맛이야” 할 때의 ‘맛’은 혀나 코에 오는 감각적 느낌을 말한다기보다는 우리가 기대고 살아왔던 어떤 손길에 대한 느낌이다. 약을 달이는 것이 그저 온도를 맞춘다거나 일정시간 끓임 이상의 무엇이었듯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 역시 정성이라는 말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되는 ‘희망과 사랑과 신념 등이 복합된 그 무엇이 음식에 담기는 과정’이다.
물론 정성이 어머니들만의 독차지는 아니다. 그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에서 확인된다. 이 말은 한 집안의 일에도, 국가적인 일에도, 범부의 일에도 두루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에는 ‘정성은 인간이 경영할 수 있는 차원 이상의 어떤 일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정성’을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아들에게 물려주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더 나아가 이것을 우리 민족이 갈고 닦아 세계에 내놓는 보편적 가치로 내세울 수는 없을까? 로마가 정의로, 독일 혹은 프랑스가 합리성으로, 미국이 실용성으로 세계에 기여했듯이 우리는 정성으로 세계에 기여할 수 없을까? 그래서 ‘실용성’에 바탕을 둔 경제논리의 찬바람속에서 떨고 있는 세계에 ‘정성’이라고 하는 온기를 나누어 줌으로써 봄바람이 불게 할 수는 없을까?
이건용<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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