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아내 머리손질까지 간섭하는 까닭

  • 입력 1998년 1월 14일 08시 00분


아내의 머리모양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때는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몇년전만 해도 커트나 파마를 하면 으레 어떠냐고 묻곤 했는데 이제는 말없이 넘어가기만 바라는 아내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손질을 한 날이면 내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달에 한번 1만원이면 넉넉한데 아내의 머리모양은 왜 그리도 자주 바뀌는지. 그럴 때마다 몇만원은 들 게 아닌가. “지금 멋이나 부릴 때냐. 나라 사정이 어떤데 몇만원씩 쓰고 다녀.” “두달만에 미용실에 갔는데…. 싼 파마약을 써서 2만원에 한 거예요.” 결국 아내가 붙여준 ‘밴댕이속’이라는 별명을 한차례 더 듣고는 긴긴 겨울밤을 보내야 했다. 언짢은 기분으로 돌아누웠으니 잠이 올 리 없었다. 텔레비전을 켰다. 할머니 한분이 도라지 껍질을 벗기는 장면이 나왔다. 불현듯 10여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마땅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던 시절. 만삭의 아내는 도라지 껍질 벗기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한관을 벗겨야 고작 5백원을 버는 일이었다. 언젠가 서울서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아내가 도라지 껍질을 벗겨서 번 1만7천원을 술값으로 단번에 써버리고 돌아와서도 신세타령만 쏟아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는지…. 문득 아내의 잠든 얼굴에 10여년의 풍상이 드러난다. 어린 나이에 사랑 하나로 내게 인생을 맡겼던 아내였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얻기까지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던 아내. 아내같은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런 아내가 두달에 한번 머리를 손질했다고 트집잡았으니 역시 나는 ‘밴댕이 소갈머리’인가 보다. 깊이 잠든 아내를 꼭 안아보았다. 눈가에 잔주름이 보였다. 콧등이 찡해옴을 느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이 너무 예뻐 남의 시선을 끌까봐 시샘해서 그런 거야.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냐.” 그리고는 속으로 결심했다. 푼푼이 모았던 비상금을 실명화해 날이 밝는 대로 아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노란색 코트를 사주겠노라고. 황종배(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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