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현재]사이버 성폭력이 더 폭력적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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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녀갈등 온라인 공간서 격화… 익명성 뒤에 숨어 여혐 조롱 재생산
상처 받은 여성들은 모방 사이트 만들어… 남성중심문화 바꿔야 性 대결도 풀린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매일 소리 없는 총격전이 벌어진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벌어지는 젠더를 둘러싼 격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 전쟁을 사람들은 ‘남녀 갈등’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여성과 남성이 단 하나의 뚜렷한 기준으로 구분되는 집단이라는 생각을 강화하거나 여남 모두가 갈등의 동등한 원인제공자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상황을 남녀 갈등이 아니라 ‘사이버 여성 혐오’와 이에 대한 ‘사이버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여성과 같은 성적 타자들에 대한 혐오뿐 아니라 이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저항과 연대 역시 사이버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어떻게 젠더 트러블이 뜨거운 감자가 되는지, 퇴행적 젠더 혐오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원인이 무엇인지, 나아가 어떻게 이에 대한 저항이 가능한지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은 누구에게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간주됐다. 그러나 그곳은 소수자에게, 특히 여성과 같은 성적 타자들에게는 상처의 공간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길거리’라는 키워드를 치면 길거리에서 몰래카메라로 찍힌 여성의 사진이 수도 없이 뜬다. 빅데이터 분석기업 아르스프락시아의 2016년 자료에 따르면 디시인사이드, 일베저장소, 오늘의 유머 등 3대 대형 사이트에서 나타난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은 5만1918건이었다. 어떻게 사이버 공간은 여성 혐오의 온상이 된 것일까.

사이버 공간은 누군가의 ‘재미’를 위해 누군가를 ‘조롱’하는 곳이 됐다. 표현이 더 신랄할수록, 무례할수록 포스팅은 더 빠르게 순환된다. 가령 ‘일베가 원하는 여성상’은 ‘재미’로 반복 순환되면서 바람직한 여성상이 되며 여기에 맞지 않는 여성상은 ‘김치녀’ ‘된장녀’ ‘꽃뱀’ 또는 ‘맘충’으로 조롱당한다.

조롱과 무례함은 익명성이나 다중인격성이라는 갑옷 덕분에 더욱 수월하게 자행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신원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 다양한 닉네임을 이용해 거침없는 욕설과 혐오를 일삼을 수도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페르소나는 가짜 인격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현실의 자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스파이더맨의 갑옷을 입고 시위에 나오는 ‘일벤져스(일베+어벤져스)’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상상과 실제의 경계가 소멸된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이버 공간의 특성 때문에 여성과 같은 성적 타자들은 상처받는다. 이들에게 사이버 공간은 불편하고 과밀한 공간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사이버 공간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여성들은 사이버 공간에 대피소를 만듦으로써 이러한 체계적인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여성시대, 메갈리아, 워마드 등의 사이트는 바로 외부 공격으로부터 여성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안전한 장소였다. 미러링은 이 장소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운 전술이었다.

그러나 바로 안전을 이유로 여성들의 커뮤니티는 점차 폐쇄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자기 보호를 위해 내적 외적 이질성을 차단할 수밖에 없는 장소의 정치를 펼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페미니스트들은 또한 남성중심적 문화에서 정해놓은 성적 이분법을 지속하게 되는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젠더 트러블은 사이버 공간을 중심으로 첨예화됐다. 사이버 공간에서 혐오가 가시화되는 퇴행적 현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페미니즘이 부상(浮上)한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에만 손가락질을 한다. 과격하다느니, 객관적이지 못하다느니 핏대를 올린다. 최근 부상한 페미니즘이 완전무결하게 정당화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남성중심주의 문화와 이를 강화하는 퇴행적 사회적 조건을 그대로 둔 채, 페미니즘을 남녀 갈등의 원인으로 호도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게 한심하다는 것이다. 돈벌이만 생각하는 4차 산업혁명이 성적 타자의 숨통을 조여 오는데, 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느냐고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퇴행의 조건들을 바로잡으려는 의지와 실천이 먼저 있다면 사이버 페미니즘 역시 폐쇄적 장소의 정치에서 벗어나 내적 외적 이질성과의 조우가 가능한 공간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사이버 성폭력#여혐#남성중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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