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마방진]스팸메일 살인사건 ②

  • 입력 2000년 4월 24일 13시 32분


마방진은 곧바로 정찬길 경사와 PDA로 통화할 수 있었다. 전화번호를 숫자로 입력하자 문자인식 장치로 자동 연결됐다. 마방진이 막 인사를 하려하지 왈도가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평소의 왈도는 언제나 사건의 뒤편에 머무는 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죽은 정인태와의 친분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고가 많습니다. 사인은 컴퓨터앞 돌연사 증후군(CSDS)이 맞나요?

-예, 단순 심장 발작에 인한 사망이라는 검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형적인 CSDS라더군요. 더 이상 수사를 해야할지….어쨌든 단순 사망인 것 같아요.

-검시 의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죠.김태호라고, 외과의사인데 병원이 경찰서 근처에 있으니까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늘가을빌딩 3층에 병원이 있어요.

-고맙습니다.

서둘러 오피스텔을 나서려는 왈도를 마방진이 불러 세웠다.

-왈도!너무 서두르지마.

-의사를 만나는 것은 당연하잖아.

-아니야. 일단 넌 정인태 씨의 오피스텔로 가봐. 둘이 몰려다닐 필요는 없잖아. 문은 열 수 있겠지?아무리 첨단 지문인식 열쇠라지만 너라면 문제 없을 거야. 난 검시의를 만나볼테니….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체크해봐. 목격자였던 이민주씨는 나중에 문상가서 만나면 될 것 같아.

-그래? …. 그러지. 문상장소는 휴대전화로 연락할게.

-검시의를 만난뒤 정인태씨 오피스텔로 갈지도 몰라.

-하여간 좀 있다 보자.

마방진은 곧장 늘가을빌딩으로 갔다.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환자를 진료 중이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10여 분 정도 지나자 검시를 했던 의사 김태호씨를 만났다.

-탐정이 웬일로? 경찰에 이미 소견서를 다 제출했는데….그런데 우리나라에도 탐정이란 게 있었습니까?

김태호는 전혀 엉뚱한 말만 늘어놓았다.

-물론 있지요.그건 그렇고 정인태씨는 평소 건강했고 혈관질환도 없었다는데요….

-어쨌거나 사인은 심장발작이 맞아요.

의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고, 피부에도 여기저기 푸른색과 희색이 나타났어요. 심근경색에 의한 전형적인 심장마비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에요. 평소 혈압이 정상이었다 해도, 심장마비란 것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왜 복상사라는 것도 있잖아요. 물론 그런 쇼크가 사망과 연결되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이번 건 전형적인 CSDS죠. 그런데 왜 CSDS사망자들은 모두 남자들인지….쯧쯧.

-부검은 해보셨나요?

-해볼 필요가 있나요?

원가를 기대했던 마방진은 아무 소득없이 병원문을 나섰다. 왈도에게 연락하자 곧장 정인태의 오피스텔로 오라는 말을 다급하게 해댔다. 그리고 뭔가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마방진이 정인태의 오피스텔로 막 들어서자 그와 왈도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렸다.

-인태씨! 뭘 그렇게 열심이예요? 괜히 왔나봐.

-아냐. 잘왔어. 잠시만….

-그냥 갈까요?

-아냐, 곧….그래! 좀 있다 하지.미안하지만 냉장고에서 주스 한 잔만 갖다줄래?

정인태는 컴퓨터 앞에 앉은채 이민주가 건네준 주스를 들이켰다.

-화아! 속이 다 시원하군.

인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민주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인태씨!요즘 뭘 그렇게 열심히 찾고있는 거야?

-응, 그냥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는 거야. 시간 때우기는 제격이지. 그러다 RPG 한 번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려.

인태는 장난스럽게 민주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인태씨도 포르노사이트를 좋아하나봐.

-으응, 별로야. 몇 번 들어가긴 했지.

-이제 가야될까봐. 서류정리할 게 많아요.

민주는 인태의 손을 슬며시 밀쳤다.

-그래? 허참 벌써 10시 반이 넘었네. 주스 한 잔만 더 줄래?

민주는 인태가 주스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마신 잔은 싱크대에서 말끔히 씻은 뒤 선반에 올려놓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만 갈게요.

민주가 나간 뒤 인태는 컴퓨터 앞에 의자를 바짝 당기고 앉았다. 오늘만큼은 '오르다' 법인에서 '보안 등급'으로 분류해 놓은 자료를 해킹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가상현실(VR)섹스 사이트인 VS가 문제였다. 오르다의 내부자료는 VS의 서버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VS는 접속하면 누구나 5분간 VS가 지정한 프로그램을 경험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본거지를 위장하기 위해 VS를 문앞에 내세운 걸 보면 똑똑한 놈들이야. 도대체 오르다법인은 무슨 비밀을 갖고 있는 거지. 무궁화메디컬센터에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인태는 고글을 썼다. 2,3년 전만해도 대형 입체 동영상화면을 즐기려면 무거운 헤드 마운터디스플레이(HMD)를 써야했으나 최근엔 스키 고글크기로 작아졌다.

그러나 VS에서 고글을 쓴 채 해킹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말초적 감각이 감돌아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다.인태는 매번 다짐을 했지만 보안자료의 문턱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VS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짜릿한 느낌은 현실의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쾌감이었다. 이번은 어느때 보다 더 강한 쾌감이 온 몸을 덮쳐왔다. 이러게 빨리 흥분이 몰려든 것도 처음이었다. 인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전율 속에 자신을 내맡긴 채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현실에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섹시한 여자들이 혀를 낼름거리며 인태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인태의 피부는 씰룩거렸고 잠시 후 몸 전체가 고압선에 감전된 것처럼 격럴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때 인태의 오피스텔 문이 조용히 열렸다.

※RPG:롤플레잉게임(Role Playing Game)의 준말. 가상현실에서 특정 주인공을 성장시키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이다. 게이머는 제작자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 준비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치 현실처럼 여러인물과 특정사건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오랜 시간 함께 모험하는 동료들도 있어 현실처럼 인간적 관계를 갖는 것도 특징.

※PDA:휴대용 컴퓨터의 일종으로 개인휴대용단말기(Personal Digital Assistants) 또는 '개인 디지털 도우미'로도 불린다. 연필처럼 생긴 필기인식 장치로 화면에 글을 쓰면 입력이 되는 게 특징. 주소록과 일정관리 등 기본기능 이외에 최근에는 통신기능을 보강해 전자우편에서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다. 미국 애플사가 90년대 초반 시험적으로 내놓은 뉴튼(Newton)이 최초의 제품이며 작년 국내 기술로 '셀빅'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문인식 열쇠:사람마다 다른 지문을 영상으로 인식해 열쇠로 활용하도록 만든 장치. 잃어버리기 쉬운 열쇠나 비밀번호와 달리 손가락 자체가 열쇠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차세대 보안장치로 각광받고 있다. 지문의 유형을 10개의 점으로 표현한 뒤 각 점의 위치정보를 암호화하는 방식이 주류, 최근 지문인식 열쇠는 외국에서 권총(미국 스미스웨손사)과 휴대 전화 리모컨에까지 부착되어 주인만 쓸 수 있도록 장치돼 있다. 지문뿐만 아니라 눈동자의 홍채와 핏줄 등 인체의 특징을 활용하려는 '생체인식 보안장치'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공동창작팀>

SF작가 그룹:박상준 이영

라이코스코리아:김명선 김문빈 박진영

그래픽:김명신 이수진

동아일보:최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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