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4>

  • 입력 2009년 4월 19일 13시 23분


제5부 태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제16장 어떤 사랑의 시작

74회

사랑에 대한 달콤한 정의는 무척 많다. 그러나 오래 앓아본 사람은 안다. 사랑이란…… '견딤'이란 것을.

"싫어요. 견딜래."

서사라는 눈에 힘을 잔뜩 실은 채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목덜미를 떠돌던 금붕어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맙시다. 벌써 한계점을 넘어섰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최 볼테르는 캡슐을 버리고 패치를 택했다. 사이보그용 진통제 '돌핀'은 진통 효과가 탁월하여 살점을 찢고 뼈를 잘라내도 통증이 없었다. 사라의 기계몸을 교체하고 수리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보통 인간보다 대여섯 배는 강력한 진통제를 구비해두었던 것이다. 이미 기계로 바뀐 87퍼센트는 고통을 몰랐지만 나머지 13퍼센트는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중 2퍼센트는 고통을 인지하는 '뇌'니까. 육체가 10퍼센트 씩 기계로 바뀔 때마다 '감각 민감도'는 두 배 이상 늘어난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싫어요. 패치는 안 붙여."

사라가 머리를 마구 흔들며 외쳤다. 그러나 87퍼센트 기계몸 중에서 거의 절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와 오른발, 그리고 왼 어깨가 겨우 흔들린 것이 전부였다. 볼테르는 귀머거리처럼 패치를 꺼내 사라의 왼 어깨에 붙였다.

"하지 마. 죽여버리겠어. 당신이 뭔데……."

차분하고 내성적인 그녀지만 진통제를 투여할 때면 반미치광이로 돌변했다. 고통을 격감시키는 대신 한 번 진통제를 맞을 때마다 만 분의 일에서 만 분의 이 정도씩 감각 민감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80퍼센트 이상 인간인 경우에는 미미한 수치지만, 겨우 13퍼센트만 인간인 사라에게는 인간적인 감각을 1 나노만큼도 잃고 싶지 않았다.

"괜찮소. 쉬이, 괜찮소."

볼테르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눌렀다.

"아악!"

비명과 함께 사라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볼테르는 그녀의 양팔을 잡고 올라타다시피 몸을 기울여 힘으로 제압했다.

"대체 누가 이런 거요? 누구 짓이오?"

글라슈트가 16강전에서 승리하던 바로 그 즈음, 사라는 '달빛마을' 낡은 아파트에서 정신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16강전이 끝날 때까지 경기장 출입을 금지 당했다. 32강전 때는 글라슈트의 경기 모습을 경기장 밖 대형 스크린으로라도 보겠다며 왔었다. 그러나 16강전이 열렸던 6월 28일 밤엔 어떤 연락도 없었다. 팀원들도 시합 준비에 바빠서 사라를 챙기지 못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사라를 처음 발견한 이는 노민선 박사였다. 민선은 경기가 끝난 뒤 혹시 경기장 근처에 사라가 와 있지나 않을까 싶어 연락을 취했고,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무산되자 사라가 임시로 묵고 있는 '달빛마을' 낡은 아파트로 찾아갔던 것이다.

사라는 가물가물 정신이 흐려지면서도 응급실로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민선의 설명에 따르자면, 사라는 계속 "3퍼센트!"를 웅얼거렸다고 한다. 천연몸을 3퍼센트 더 다쳐 기계몸이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기록할 것이고, 그렇다면 사라는 '인권'을 지키고 증명하기 위한 기나긴 재판을 시작해야 한다.

16강전을 통과한 후 기쁨에 젖어 있던 글라슈트 팀은 민선의 차에 실려 온 사라로 인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글라슈트 정비에 박차를 가하던 볼테르는 급히 사라를 수술실로 옮겼다. 그리고 팀원들의 출입을 금했다.

"한숨 푹 자도록 해요. 곧 맑고 푸른 바닷가에서 아침을 맞는 기분이 들 거요."

13퍼센트의 육체로 약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달콤한 졸음이 밀려들었다. 고통 없는 잠. '돌핀'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와서 사라의 성난 눈동자를 반도 넘게 가렸다.

"싫……어."

사라는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볼테르는 천천히 그녀의 수퍼스마트슈트를 벗겼다. 검은 나신은 아름다웠지만, 허리와 등이 군데군데 방망이로 맞은 듯 움푹 들어갔고 왼 팔꿈치 관절은 아예 꺾여 부품이 튀어나왔다. 한바탕 격투를 치른 글라슈트처럼.

볼테르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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