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242…입춘대길(3)

  • 입력 2003년 2월 13일 18시 46분


코멘트
집안이 온통 유품투성이였다. 유품을 볼 때마다, 둘의 목소리가 되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엄마, 하고 우근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1시간 이상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곤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엊그제 아침, 잠에서 깨어나, 몇 가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이 저고리 소매를 꿸 팔이 없다, 이제 이 고무신을 신을 발이 없다, 이제 이 가방 손잡이를 잡을 손이 없다, 이 빗으로 빗을 머리칼이 없다, 이 모자를 쓸 머리가 없다…이해는 하지만 전부 태워버리면 둘이 돌아왔을 때 어쩌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가게 물건의 매입과 매상과 종업원 생각을 하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여, 꼬박 이틀에 걸쳐 유품을 고리짝에 담았다.

희향은 복조리를 주워들고 우물 옆에 쌓아둔 고리짝에 한 개씩 씌웠지만, 고리짝에서 비어져 나온 치마저고리와 바지저고리, 마고자와 두루마기와 조끼, 버선과 토시, 고무신과 짚신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희향은 저고리 소매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머리가 마비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꿈속에 있을 때는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꿈을…,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다. 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그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살며시 이불에서 빠져나와 아침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그 아이를 흔들어 깨운다. 소원아, 일어나라, 아침이다, 빨리 안 일어나면 아침도 못 먹고 학교에 가야 한다. 도저히 이게 현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남에게 생긴 불행한 일을 얘기로 듣고 충격을 받은 것만 같다.

나는 어제와 오늘도, 궂은날과 갠 날도, 밤과 낮도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꾸미고는 어김없이 앞으로 나아가, 지금도 나를 끌고 가고 있다. 무겁고 커다란 바퀴로 짓뭉개주면 좋으련만, 시간은 나를 사슬로 꽁꽁 묶은 채 나아가고 있다.

잠이 온다. 서 있기가 힘들다. 하지만 잠들기가 두렵다. 누우면 아픈 가슴을 견딜 수 없어 몸을 뒤척이고, 첫닭이 울 때까지 하염없이 몸만 뒤척이는 밤도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