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암울했던 시대, 청춘을 위로한 시인의 자기고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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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베스트셀러]1994년 종합베스트셀러 5위(교보문고 기준)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지음/128쪽·8000원·창비

조해진 소설가
조해진 소설가
아주 드물지만 어떤 유행어는 코미디언이나 아름다운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문학 작품에서 연원되기도 한다. 1994년, 서른세 살 젊은 시인이 출간한 첫 시집이 이 뜻밖의 현상을 만들었다. 시인의 이름은 최영미, 시집 제목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 조금이라도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른 살에서 반사적으로 잔치를 연상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단지 매력적인 제목으로 돌풍을 일으킨 건 아닐 것이다. 말장난이나 사춘기적 감성과는 거리가 먼 문학적인 시집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시집에 수록된 쉰여섯 편의 시에서 찾아야 할 테다.

일단 이 시집의 시들은 잘 읽힌다. 문장이 어렵지 않은 데다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솔직한 표현이 넘쳐난다. 그런데 곰곰 들여다보면, 그의 연애시에는 좀처럼 개인의 고뇌와 고통을 보려 하지 않던 이전 시대의 위선을 폭로하는 용기도 포함돼 있다. 그의 애인은 그가 지나온 시대이기도 했을 테니 당연하다.

도발적인 면도 있었다. 아침상에 오른 굴비나 개인 컴퓨터에서 사랑 혹은 관계의 육체성을 언급하는 시인은 요즘 시대에도 찾기 어렵다. 보편적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충분히 도발적인 매력 때문인지 25년 전의 시들은 지금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물론 시집이 인기를 끈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시집이 출간된 1994년은 기나긴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막 들어선 때였다. ‘잔치’는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던 혁명이기도 한 셈이다. 이 전환의 시대에 최영미는 시집 표제작에 이렇게 썼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잔치(혁명)는 끝났다는데 제대로 끝낸 건지 알 수 없어 다들 조금씩은 회의감에 젖어 있던 때, 젊은 시인의 이 고백은 시대적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배고픔이라는 직설에서(‘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나만이 순수하지 못한 게 아니라는 위로를 얻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1995년 미성년을 벗어나 대학생이 됐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 혁명은 흔적조차 희미했고 싸울 대상은 불분명했다. 개인이 곧 신념이자 윤리인 시대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은 부지런히 흘렀고, 운동가를 부를 줄 알던 사람들은 이제 중장년이 돼 서른 살은 잔치가 끝난 나이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새파란 청춘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시인의 도전은 미투 운동으로 번져갔다. 올해 발간된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미)에서도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지만 사실 1994년 그는 이미 완성된 전사(戰士)였다.

조해진 소설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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