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서럽다]<4>슈퍼엄마 콤플렉스

  • 입력 2004년 6월 24일 19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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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직장인이자 주부인 박은경씨(37·가명)는 최근 둘째아이의 시력검사 결과에 아연해졌다. 여섯살이란 나이에 고도근시라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또 ‘그동안 아이를 어떻게 돌보았기에…’라는 남편과 집안 어른의 질책이 먼저 떠올랐다. 지난해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의 일까지 떠올라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근무가 끝나자마자 아이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하루 종일 간병인에게 맡겨져 있던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30분간 악을 쓰며 울어댔다. 아이의 입원기간 몸이 파김치가 됐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보다는 ‘아이 감기는 엄마의 애정부족’ 탓으로 돌리는 주위의 태도가 더욱 힘들었다. 고민하던 박씨는 결국 최근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 육아와 직장 일 사이에서 줄타기

일하는 엄마들은 일에서 성취감을 맛볼수록 한쪽 어깨가 기울어짐을 느낀다. 육아휴직을 신청하거나 아이의 급식당번을 이유로 휴가를 내기란 여간한 배짱이 아니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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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강사인 박정화씨(39·경기 일산)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 주시지 않았다면 대학 강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육아’와 ‘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이들을 더욱 좌절하게 하는 것은 유능한 학원강사에 머리 좋게 하는 약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급정보를 공유하는 이른바 ‘머피아’ (엄마와 마피아를 합성한 말로 막강한 전업주부들의 공동체)의 존재이다.

머피아란 개념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 ‘육아’와 ‘일’ 사이에서 고민했던 선진국의 직장여성들은 마찬가지로 슈퍼우먼이 되기를 요구받았다. 이른바 ‘사커맘’(방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축구연습을 시키는 엄마에서 연유한 말)이 그들이다.

그러나 전업주부라고 편할까?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녁 먹고 학원으로 가 오전 한두시까지 수업을 받는 동안 엄마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학원 앞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린다. 학원버스가 있긴 하지만 단 5분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서다. 가사와 아내, 엄마노릇에 자신의 일은 가질 엄두도 못 낸다. 수험생 엄마는 남편과 각방을 쓰는 건 기본이다.

과도한 육아부담이 출산을 기피하는 원인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3세 신화’이다. 아이가 태어나 세 돌이 되기까지 엄마가 직접 키우지 않으면 아이의 정서, 인격형성에 결함이 생길 수 있다는 이 육아론은 너무나 지배적이어서 아예 ‘신화’의 수준으로까지 격상됐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바로 출산율 저하였다. 1998년 일본은 ‘1.38쇼크(여성 1명의 평균출산율이 1.38로 떨어진 데 대한 위기감)’로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지난해 평균출산율은 이보다 더 떨어진 1.29로 최저였다.

○ 자녀 생활매니저로… 운전기사로…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천선영 선임연구원은 최근 육아가 힘들어지고 있는 이유를 ‘자녀 숫자가 줄어들면서 자녀 한 명에 대한 기대와 투자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전통사회에서 아이들은 훨씬 더 많이 태어났지만 그들 모두가 요즘처럼 집중적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과거 출산율이 높았던 시절에는 유아사망률도 높았고 자녀에 대한 기대도 분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두 자녀가 고작인 가정에서 아이는 제왕과 같은 존재가 된다.

다양한 육아정보와 교육프로그램의 범람 등 ‘질적’ 육아에 대한 요구도 엄마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태교에서 유아영어에 이르기까지 조기교육을 강조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소개되면서 놀이마저 프로그램화되고 있다.

‘아이의 성적은 90% 엄마 책임’이라는 지능개발교재의 선전 문구를 보는 엄마들은 ‘혹시 내가 못나 아이를 잘 못 키우는 게 아닐까’ 덜컥 지갑부터 열게 된다.

육아사이트 ‘쑥쑥닷컴’의 서현주 대표는 “조기교육은 한결같이 엄마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들의 부담이 크다”고 설명한다.

현대사회에서 엄마들은 단순한 양육자가 아니다. 과학적 교육자, 생활매니저, 운전기사로 수시로 변신해야 한다.

경기 고양시 일산 P어학원의 수강생 10명 중 8명은 바쁜 아침 시간에 집안일을 대충 끝내놓고 모여든 엄마들이다. 학원 숙제도 봐주어야 하고 영어단어의 뜻이라도 물어오면 막힘없이 답변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주부 수강생 김준희씨(33)는 “아이의 원어민 선생님과 상담도 해야 하고 영어동화책도 읽어줘야 하는데 평소 실력으론 부족하다”고 털어놓았다.

가사, 육아에의 아버지 참여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치맛바람’에 버금가는 ‘바짓바람’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높은 관심은 오히려 ‘주부들의 육아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뿐이다.

연세대 의대 신의진 교수(정신과)는 “만능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자책감과 상처만을 낳는다”며 “좋은 엄마, 슈퍼엄마를 향해 내달리는 모든 엄마들은 멈춰 서서 스스로의 내면을 점검해보라”고 조언했다.

금현숙 사외기자·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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