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혼수 전쟁/"딸은 다 도둑이라더니…"

입력 2000-03-06 19:29수정 2009-09-2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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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엄마, 나 세탁기는 드럼세탁기로 할래.”(딸)

“아니, 굳이 비싼 세탁기를 사야 하니?”(엄마)

“빨래가 엉키지 않고 나중에 기저귀빨래 생겨도 삶을 필요가 없대요.”(딸)

“….”(엄마)

“냉장고는 저거(634ℓ) 살래요.”(딸)

“둘이 살 건데 그렇게 큰 게 필요해?”(엄마)

“큰 거 사야 잘 산다잖아요.”(딸)

이경희씨(29·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지난해 1월 결혼하면서 어머니 한문자씨(58·서울 강남구 청담동)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음대졸업 후 4년간의 유럽유학. 그리고 귀국 1년만에 올린 결혼식.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 스스로 모은 결혼자금도 없었다. 미안하면서도 ‘기본’은 해가고 싶은 욕심에 엄마에게 사사건건 신경질부리고 ‘못나게’ 굴었다. 그때마다 엄마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

“저게 시집가기 전에 정떼려고 저러지….”

들은 결혼하면서 ‘전쟁’을 치른다. 상대는 하나가 아니다. 엄마도, 예비 신랑이나 시댁어른도 때론 ‘적’이 된다. 그러나 역시 자주 부딪히는 건 엄마와 딸. 가족학자들은 “결혼예식은 많은 경우 딸의 인생주기에서 엄마와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 이벤트”라고 말한다.

#장면 2

김모씨(28·경기 고양시 일산)는 2년 전 일류대 출신의 신랑과 결혼했다. 혼수 장만때 시어머니는 미리 가구를 보고 와선 “다녀보니 A가구의 B만한 모델이 없더라”며 매일 같이 어떤 살림살이를 어느 정도 구입했는지 진행사항을 ‘점검’했다. 나중엔 신혼여행지까지 시어머니가 예약을 했다.

김씨의 엄마 구모씨(55)는 “말도 안되는 참견을 하는 시어머니와 어떻게 살 작정이냐?”며 결혼을 말렸지만 김씨는 “식 올릴 때까지만 참자”라며 견뎠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참견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결혼을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 여기던 딸들도 막상 정혼단계에 이르면 집안끼리의 결합으로 ‘승격’되는 현실에 놀란다. 게다가 전통적 ‘앙혼(仰婚·여자가 자신보다 좋은 집안의 남성과 혼인하는 것)’의 개념이 사라지지 않아 딸을 둔 집안은 시집의 여러 가지 ‘요구’에 맞출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경제적 심리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한 자녀와 부모는 필연적으로 결혼을 ‘대결의 장’으로 만들고야 마는 것.

#장면 3

딸 이병옥씨(27·인천 계양구 임학동)〓결혼하겠다는 내 말에 대한 엄마의 첫마디는 “너, 벌어놓은 것도 없잖아?”였다. 물론 직장다니면서 버는 돈은 겨우 나 용돈쓸 정도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그래서 “그럼 어떡해. 사람도 있고 나이도 있는데, 그럼 가지마?”했다. 엄마한테 미안해서 혼수는 시계도 하지 않을 정도로 간소하게 했다. 그렇지만 책상과 책장은 있어야하지 않나? 공부는 평생을 해야하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 화를 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난달 12일 대학시절 커플과 결혼했다.)

엄마 김종숙씨(49)〓대학까지 공부시켜 놓으니까 딸은 겨우 제 용돈이나 벌어썼다. 그래도 남자친구가 있길래 친구딸들 결혼할 때마다 식장에 다니며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시댁에 들어가 산다니까 가전제품은 좀 덜해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다 새로 장만한다고 했다. 기왕에 해주려던 거니까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상까지 사겠다는 거다. 책상이야 쓰던 걸 가져가면 되지 새로 해가겠다고? 원 세상에. (그래도 김씨는 “집에서 예쁘게 입고 있어야 한다”며 딸에게 홈드레스 두 벌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도 피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결혼한 이윤경씨(29·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결혼 당시 시댁과의 갈등이나 친정 엄마와의 갈등은 ‘제로’였다고 말한다.

가전제품은 대부분 자취를 하던 신랑의 것을 그대로 쓰기로 했고 가구는 둘이 골랐다. 그릇 등 왠만한 주방용품은 친정에서 가져왔다. 결혼 예식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예산을 세운 뒤 남자 6, 여자 4로 분담해 통장에 넣어두고 신혼여행 패물 예식장비 등에 사용했다.

경희대 유영주교수(가족관계)는 “성인이 된 뒤에도 부모로부터 경제적 심리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자녀와 그들을 독립시키지 못하는 부모, 모두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결혼을 성숙한 두 남녀의 ‘개인적’ 결합이라고 여기면 혼수를 둘러싼 갈등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엄마와 딸이 서로 별개의 개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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