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LA리포트]당파적 판결이 미국 대선 망쳤다

  • 입력 2000년 12월 20일 18시 45분


미국 대선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세계가 부러워해 온 미국의 선거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만천하에 보여줌으로써 그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세기도 아닌 21세기, 제3세계의 독재국가도 아니고 미국에서 국민의 표를 더 많이 얻은 후보가 선거인단과 승자독식주의라는 시대착오적 제도에 의해 패배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국민의사 왜곡 심각한 문제▼

게다가 세계 최고의 첨단산업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펀치로 후보를 찍는 투표용지, 그것도 기이하게 만들어져 어디를 펀치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투표용지 때문에 불과 560표 차로 승자를 결정한 플로리다주의 한 카운티에서만 무려 1만7000명의 투표가 무효처리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부 진행된 수검표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를 찍었지만 펀치한 종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 기계가 읽지 않은 표에서 종이조각을 떼어내 삼켜버린 민주당 검표원의 이야기는 세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하나의 코미디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흑인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아프리카계의 경우 등록 착오, 부당한 증명서 요구 등으로 투표를 하지 못한 사례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투표를 한 사람도 백인에 비해 4배나 많은 비율이 무효처리됐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인종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아프리카계가 지적으로 열등해 투표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사태가 이러하기에 유력한 현지 언론에 “차라리 동전 던지기로 승자를 가리자”는 칼럼이 나오는가 하면 유엔은 미국이 원하면 선거감시단을 보내주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아가 한 아프리카 학자는 얼마 전에 실시한 탄자니아 선거에서 일부지역에서 플로리다주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미국이 재선거를 요구해 미국의 선거감시단 입회하에 재선거를 실시한 사실을 들어 미국의 이중잣대를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법원 판결들, 특히 연방대법원 판결입니다. 판결들은 법원이 공정한 심판자가 아니라 당파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특히 위헌판결권을 갖고 있어 미국의 최종심판관 구실을 해온 연방대법원이 일관되지 못한 판결과 당파적으로 첨예하게 분열된 판결을 내림으로써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습니다.

이는 다수파가 문제의 투표용지에 대한 재검표를 거부함으로써 이번 선거의 진정한 승자가 누군지 모르게 됐을지 모르지만 법관을 법의 공정한 수호자로 보는 ‘국민의 신뢰’가 명백한 패자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한 한 대법관의 의견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진짜 패자는 단순한 국민의 신뢰가 아니라 국민 그 자체, 즉 국민의 참정권입니다. 이번 대선은 국민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기이하게 만들어진 투표용지, 그 판독기, 그에 의해 무효처리된 투표용지의 재검표를 거부한 연방대법원의 당파적 판결로 결정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링컨의 말처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 “펀치용 투표용지의, 투표용지 판독기를 위한, 연방대법원에 의한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번 소동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결정에 승복하고 별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미국은 위대한 나라라는 일방적인 칭송입니다. 물론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부분이며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물의 한 면에 불과합니다. 이번 문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피를 흘려 획득한 투표권, 특히 부당하게 투표권을 박탈당한 아프리카계의 투표권 문제이며 이는 고어 후보가 승복해 줄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투표권 사수위한 저항도 없어▼

따라서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투표권 사수를 위한 국민적 저항이 없다는 것은 법물신주의에 빠진 미국 시민사회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우려는 미국도 이 지경인데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이번 선거의 진정한 교훈은 그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란 어디에서도 완성된 것이 아니고 부단한 투쟁을 통해 쟁취해 나가야 할 진행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손호철(서강대 교수·현 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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