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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7월 25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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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공통점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정치사찰 리스트에 오른 문인 예술가들이다.
미국 땅을 한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피카소에 대한 비밀 기록이 187쪽에 이른다. 그는 ‘C(공산주의자)’ 및 ‘R(러시아 첩자)’로 분류됐다.
FBI를 ‘미국의 게슈타포’에 비유했던 헤밍웨이에 대한 ‘X파일’은 FBI의 사감(私感)이 역력하다. “그는 술주정뱅이에 공산주의자였고, 동시대 작가 중 최하위였다!”
FBI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거느렸다. 배우 로널드 레이건과 존 웨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충실한 정보원이었다.
1908년 ‘법무부 검찰국’으로 출발한 FBI는 1924년 29세의 젊은 국장 에드거 후버가 부임하면서 국내 스파이활동에 젖어들었다.
냉전과 반공주의의 광기 속에서 수만명의 시민운동가, 반전그룹, 인권 및 소수민족 단체에 대해 도청 미행 감시 폭로 암살 등의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FBI의 일생’을 살았던 후버.
그는 무려 48년간 국장으로 재임하며 8명의 대통령을 모셨다.
대통령들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케네디와 닉슨이 그를 해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후버는 그들의 결정적인 약점을 쥐고 있었으니.
1972년 후버가 숨지자 닉슨 대통령은 “그는 미국의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레이건은 “후버보다 이 나라에 업적을 남긴 20세기의 인물은 없다”고 애도했다.
과연 그럴까. 그의 사후 충격적인 사실들이 폭로된다.
그는 재임 중 공직사회의 동성연애자를 색출하는 데 열을 올렸으나 그 자신도 동성연애자였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연막(煙幕)’이었다나.
마피아와 ‘추잡한 거래’를 일삼았던 그는 1939년 마피아 소탕 때는 ‘암흑가의 수상’ 프랭크 코스텔로와 함께 진압작전을 논의했다고.
1972년에는 닉슨의 재선을 위해 선거에 개입했다.
그의 죽음은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는 집무실에서 급사(急死)했으나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부검이 실시되지 않은 급사(急死)에 대해 일부에서는 타살로 단정한다. “후버의 적(敵)은 세계 도처에 득실대고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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