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의 적들<2>연고]룰은 없고 줄만 있다

  • 입력 2002년 4월 1일 18시 04분


‘줄을 찾아라.’

명절 때 귀성표 구하기, 종합병원의 진료예약, 골프장 부킹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줄 찾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원(民願)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아는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각종 ‘부패 게이트’의 근저(根底)에도 따지고 보면 고향 선후배, 학교 동창이라는 연고가 개재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승진도 줄을 타야〓공직사회에서는 인사철만 되면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줄을 찾아 나서는 게 풍속도처럼 돼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 공기업의 경우를 보자. 6월의 임원 인사를 앞두고 지금 지연과 학연으로 뭉친 3개 파벌의 인사 로비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각 파벌을 대표하는 3명의 부장 중 누가 이사로 승진하느냐에 따라 일반 직원에 대한 후속 인사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 장관 비서관을 지내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A부장은 상급기관 실세 국장과 동향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평. 그러나 최근 라이벌인 B부장의 직속 부하인 C씨가 여권 유력정치인 처남에게 줄을 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A부장 측에 비상이 걸렸다.

C씨는 “내가 승진하기 위해서라도 B부장의 승진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며 “최근 고교 선배인 상급기관 과장급 인사를 두 차례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접대비로 쓰기 위해 적지 않은 액수의 돈도 준비해뒀다”고 털어놓았다.

지방의 공직사회가 단체장선거에 따른 편가르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도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민선단체장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운 간부들을 요직에 전진 배치하는 반면 상대 후보에 줄을 선 간부들은 한직으로 내쫓는 식의 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탓이다.

▽선거판의 연고 찾기〓국회의원 K씨는 의정활동과는 관계없는 직함을 무려 16개나 갖고 있다. 고교 총동문회 부회장, 종친회 자문위원, 향우회 고문,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법률상담소의 이사 등. 정확한 단체 이름과 직함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대부분이 선거용 직함이다. K의원은 “같은 성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표를 찍는 유권자가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다”고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예정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주의’ 사조직 2000여개를 감시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들 사조직은 동창회 1169개, 종친회 518개, 향우회 293개 등으로 연고로 뭉친 단체가 대부분이다.

▽경쟁력 갉아먹는 연고 위주의 기업 협력체계〓97년 외환위기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기업간 협력체계에 있어 연고주의 관행은 경쟁력을 잠식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기술 위주의 아웃소싱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건설업 등 일부 업계에서는 협력업체 선정과 각종 구매 입찰 등에서 연고주의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소업체인 D건설은 지난해 대기업인 S건설로부터 협력업체 선정에 응해보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아무 연고가 없어 고민하다가 S건설 퇴직 간부를 거액의 연봉을 주고 회장으로 영입하는 단안을 내렸다.

덕분에 D건설은 최근 경쟁업체를 따돌리고 S건설의 협력업체로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D건설 대표 P씨는 “솔직히 경쟁업체 중에 우리보다 기술력이 뛰어난 곳도 있었다”며 “그러나 새로 영입한 회장의 활약으로 협력업체 선정은 물론 이후 몇 차례의 공사에서 입찰예정가를 미리 알아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협력업체 경쟁 때 발주 회사의 현장 소장급 이상 퇴직자가 운영하는 업체에 10%의 가산점을 주는 게 공식화돼 있다는 말도 있다.

▽문화·체육계의 학맥〓지난해 한 지방자치단체가 창작지원금 지급 대상으로 2개 공연단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학맥 논란이 빚어졌다. 심사위원 P씨가 자신의 제자가 단장으로 있는 한 공연단체를 지원대상으로 선정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

체육계의 고질적인 편파판정 시비의 이면에도 학연을 중심으로 한 파벌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최근 검찰 수사로 번진 태권도협회 비리의혹의 출발점은 지난해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의 편파판정 시비였는데 여기에는 Y대와 K대 출신 졸업생들이 심판 배정에서 탈락하는 등 학연을 둘러싼 파벌싸움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새치기 민원으로 실종된 예약문화〓연줄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새치기가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선진사회의 기본인 예약문화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에 있는 H골프장의 한 임원은 부킹을 받는 매주 화요일이면 휴대전화를 꺼놓는 것은 물론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호텔 객실에서 업무를 본다. 권력기관부터 보통사람까지 온갖 연줄을 동원한 부킹 민원 전화가 폭주하기 때문이다.

국내 항공사들이 설과 추석 연휴 때 임시로 증편하는 항공 좌석은 대부분 VIP의 민원해소용으로 소요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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