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놓고 제방 쌓고… 민초들의 삶 보듬은 ‘살아있는 보살’

전주영기자 입력 2015-09-14 03:00수정 2015-09-14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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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7>행기 스님
일본 긴테쓰나라 역을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행기 스님 동상. 분수대 한가운데에 서 있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나라를 찾은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사진을 찍는 장소이기도 해서 행기 스님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느끼게 한다. 높이 15.4m, 폭 62m에 달하는 대형 저수지인 사야마이케 모습.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전북 김제 벽골제와 축조 방법이 거의 비슷하다. 행기 스님이 개·보수 공사를 주도했다. 사야마이케 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구라쿠 요시유키 관장이 1층에 설치된 실제 제방 단면 옆에서 백제의 저수지 축조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사야마이케 축조 1400년이 되는 내년에 김제 벽골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하는 일을 추진 중이다. 나라·사야마=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 26회에 소개된 도다이지(東大寺·동대사) 대불(大佛)은 당대 최고 장인들의 기술력이 응집된 걸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돈을 끌어모으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왕이 독려한 국책사업이라 해도 사업을 실행하려면 이를 주도적으로 총괄할 지휘관이 필요한 법. 이 사람이 바로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 행기(行基·668∼749) 스님이다. 스님은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살아 있는 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종교 지도자이다. 그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 논문만도 1000편이 넘을 정도다.》

○ 백제의 후손 행기 스님


일본 고대 불교사의 고승열전인 ‘원형석서(元亨釋書)’라는 책에는 행기 스님이 ‘668년 지금의 일본 오사카(大阪) 부 사카이(堺) 시에서 태어나 백제인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속성(俗姓) 고지(高志)씨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님 묘지에서 발굴된 사리병 속에서 나온 기록인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도 행기 스님이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스님의 부친은 백제 도래인 후예인 가와치노아야(西文)씨 일족으로 왕인 박사의 후손인 고시노사이치(高志才智)로 알려져 있다.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행기 스님의 모친 하치타노 고니히메(蜂田古爾比賣)도 백제계 도래 씨족”이라며 “일본의 고대 불교 지도자들 중에는 행기 스님처럼 도래인 출신이 많지만 행기 스님은 그중에서도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끌어내려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민중들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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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행기 스님은 15세에 아스카데라(飛鳥寺)로 출가한 이후 20년간 참선 수행을 한 뒤 민중 속에서 포교를 했다.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실상을 알리고 불법을 설파하면서 이들의 고단한 삶을 치유했다. 평생 일본 각지에 49개의 절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가 세운 절들은 ‘행기의 49원’이라 불린다.

○ 민중 속으로 들어간 스님

그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다리, 제방, 저수지를 만든 정치가이기도 했다. 속일본기는 ‘행기의 추종자가 1000명을 넘었고 어디를 가든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투어 찾아와 예배했다. 중요한 곳마다 다리를 놓고 제방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741년까지 가와치, 이즈미, 셋쓰, 야마시로 지역에 연못 15개, 개천 7개, 수로 4개, 송수관 3개, 도로 1개, 항구 2개, 역참 9개소 등이 행기 스님의 주도하에 세워졌다. 전국에 건설해준 크고 작은 다리만도 무려 300개가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다리는 쇼무(聖武·재위 724∼749년) 왕의 간청으로 741년 건설했다고 하는 교토의 교닌(恭仁)교이다.

당시 야마토 정권은 커져 가는 행기 스님의 세(勢)를 두려워해 그와 제자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속일본기에는 717년 일본 조정이 스님과 그 제자들을 옥에 가뒀으나 민중의 반발이 거세 다시 풀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에서도 개발이나 관개 사업을 하는 데 스님의 기술력과 동원력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745년 77세 때 행기 스님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승정(大僧正)으로 추대된다. 4년 후인 749년에는 쇼무 왕이 행기 스님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왕위를 딸에게 넘긴 뒤 출가했다. 그해 행기 스님은 스가하라지(管原寺)에서 숨을 거뒀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보살의 칭호를 내렸다.

○ 행기 스님의 발자취

행기 스님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도다이지 청동대불 건립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추진력이었다. 행기 스님은 도다이지 대불을 조성하는 돈을 모으고 절을 알리는 ‘권진(勸進)’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도다이지 대불전(大佛殿) 비문(碑文)에 따르면 행기 스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권해 5만1590명이 나무를, 37만2075명이 금전을 시주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구리 73만 근, 밀랍 1만7000근, 연금(鍊金) 5000냥, 수은 6만 냥, 숯 1만7000석이 대불 조성에 사용됐다. 51만4102명이 기술 인력으로 참여했고 자원 봉사 인원도 166만5071명이었다.

대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행기 스님은 여든을 바라보는 노령(79)인데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으나 아쉽게도 대불 조성을 보지 못하고 81세로 입적한다.

스님의 자취는 아스카 나라 교토 오사카 등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도다이지에는 스님의 이름을 딴 법당인 ‘행기당(行基堂)’이 있으며 그가 태어난 사카이 시 시립박물관에는 초상이 전시돼 있고 오사카 시 야마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행기 대교’라 불린다.

스님의 흔적을 찾아 6월 초 나라를 찾았다. 나라 지하철역에서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분수대 한가운데 서 있는 행기 스님 동상이었다. 전철을 타고 나라에 도착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사진을 찍는 장소가 이곳이니 행기 스님은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도다이지가 스님이 꽃피운 일본 불교유산의 흔적이라면 오사카 사야마 시에 있는 저수지 사야마이케(狹山池)는 민중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고자 헌신했던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스님은 오사카 항 근처 높이 15.4m, 폭 62m에 달하는 대형 저수지인 사야마이케 축조 100여 년이 흐른 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주도했다. 저수지에서 논밭으로 물이 이동하는 나무 파이프를 연장시켜 더 넓은 지역에 농수가 공급되도록 한 것이다. 이 저수지 역시 당초 백제인들의 기술로 만들어진(616년) 것이었다. 사야마이케가 처음 축조된 아스카 시대에는 나무로 만든 파이프로 물을 공급했지만 지금은 콘크리트 파이프로 오사카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사야마이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전북 김제 벽골제와 축조 방식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기자는 사야마이케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에서 구라쿠 요시유키 관장을 만났다. 구라쿠 관장은 사야마이케 축조 1400년이 되는 내년에 김제 벽골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하는 일을 추진 중이다. 이미 2012년 김제시와 상호협력 의향서(MOU)를 체결했다고 한다.

○ 저수지를 본뜬 박물관

박물관은 실제 저수지를 건물 내에 옮겨놓은 듯 인상 깊은 건축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어 2001년에 완공한 것이다. 제방의 단면을 본떠서 만든 데다 건물 내부에는 저수지처럼 공간을 만들어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1년에 10여만 명이 방문한다는 이곳 1층 로비에는 커다란 제방 단면이 전시되어 있다.

2001년 초대 관장으로 부임했다는 구라쿠 관장 사무실 책꽂이에는 ‘풍납토성 건국의 기틀을 다지다’ ‘백제사회사상사’ ‘한국 고고학 강의’ 등 한국 책들이 꽤 보였다. 그는 “풍납토성뿐 아니라 백제시대 때 산성, 제방을 축조하는 방법들이 사야마이케 축조 방법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며 “김제 벽골제는 사야마이케 축조 시기보다 300여 년 앞선 4세기경 백제 건국 초기에 만들어졌는데 백제가 사야마이케에 영향을 준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사야마이케와 김제 벽골제를 “형제 제방”이라고 표현하며 “두 제방이 닮은 이유는 백제의 기술인 부엽 공법이라는 공통된 축조 기술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엽 공법은 흙으로 제방이나 성을 축조할 때 흙 사이에 풀이나 나뭇가지 등 식물을 엮어서 쌓아 견고하게 만드는 기법이다. 이렇게 흙과 식물을 샌드위치처럼 쌓으면 결속력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고야마다 고이치 학예원도 “백제의 기술인 부엽공법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이 맺어온 인연의 증거물이다. 부엽공법은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돼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고 있다”며 “백제인의 피가 흘렀던 행기 스님이 백제 기술인 부엽공법을 사용해 사야마이케 재건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구라쿠 관장은 “사야마 지역과 백제가 공통된 수리관개시설을 축조했다는 것은 고대에 서로 긴밀한 교류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다. 한일이 협력한 농경문화의 유산과 그 의미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한일 학계와 민간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야마=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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