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제품도 실패한다…화이자·미쉐린이 놓친 ‘혁신의 사각지대’ [딥다이브]

  • 동아일보

인공지능(AI) 혁신의 시대, 승자로 올라서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하죠. 그럼 누가 승리할까요? 가장 똑똑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천재 엔지니어? 소비자를 사로잡을 ‘와우 포인트’ 서비스를 한발 앞서 선보이는 기업?

글쎄요. 기업의 세계에선 최고의 혁신 제품을 가장 빨리 출시하고도 처참히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혁신이란 건 기업 혼자 잘해봤자 소용없거든요. 혁신의 ‘생태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기업의 발목을 잡는 ‘혁신 사각지대’를 분석한 책 ‘더 와이드 렌즈(The Wide Lens)’를 들여다봤습니다.

(전략 전문가인 론 애드너(Ron Adner) 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교수가 2012년 쓴 책. 한국에선 ‘혁신은 천 개의 가닥으로 이어져 있다’는 제목으로 2012년 나왔지만 절판됐습니다.)

혁신은 경주가 아닌 퍼즐 맞추기와 같다. ‘최고의 제품’만으로는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게티이미지
혁신은 경주가 아닌 퍼즐 맞추기와 같다. ‘최고의 제품’만으로는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게티이미지

*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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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가 망하는 이유
1979년 출시돼 전 세계를 휩쓴 소니 ‘워크맨’.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 제품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데요. 그럼 이건 어땠을까요. 1998년 한국의 새한정보시스템이 세계 최초로 출시한 MP3 플레이어 ‘MP맨’.

MP맨은 꽤 훌륭한 제품이었습니다. ‘디지털화’라는 시장 변화를 정확히 파악했고, 적절한 파일형식(MP3)을 채택했죠. 하지만 출시 직후 ‘충격의 문제작’으로 화제를 끌었던 MP맨은 결국 실패했고요. MP3 플레이어 시장의 진짜 승리자는 3년이나 늦게 나온 애플 ‘아이팟’이 됩니다.

1998년 상용화된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MP맨. 플리커
1998년 상용화된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MP맨. 플리커

그럼 MP맨은 왜 워크맨처럼 ‘선발주자의 이점’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혁신 생태계가 미처 준비되기 전에 너무 일찍 나온 탓이었죠. 1998년만 해도 MP3 파일을 살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불법 다운로드가 있긴 했지만, 28.8kbps의 느린 모뎀으로 앨범 하나를 다운로드하려면 몇 시간씩 걸렸죠. 그게 바로 워크맨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워크맨은 카세트 테이프의 표준화(1972년)가 끝나고 널리 보급된 이후에나 출시됐으니까요.

론 애드너 교수는 이를 ‘공동 혁신의 위험’으로 설명합니다. 아무리 기업이 혼자 빨리 치고 나가도, 그 생태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괜히 풀 악셀을 밟으며 가장 먼저 치고 나와봤자, 어차피 저 앞 빨간 신호에 걸려서 기다리는 건 경쟁자들과 똑같은 거죠.

이와 비슷한 사례가 노키아의 3G폰입니다. 2002년 노키아는 엄청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 최초의 GSM/WCDMA 호환 3G폰인 ‘노키아 6650’을 출시했어요. 에릭슨과의 기술 경쟁에서 승리했죠.

문제는 3G폰으로 이용할 3G 서비스-예컨대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엄청난 투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3G폰은 그저 업그레이드된 2G폰일 뿐이었어요. 노키아 6650은 ‘도로 없는 세상의 페라리’ 같은 신세였죠. 3G 서비스가 실제 의미 있는 매출로 이어지기 시작한 건 2008년이 돼서 였어요.

노키아의 첫번째 3G폰이었던 노키아 6650. 위키피디아 제공
노키아의 첫번째 3G폰이었던 노키아 6650. 위키피디아 제공

필립스의 HDTV 사례도 마찬가지인데요. 필립스는 1980년대 중반 고화질 TV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요. 고객이 열광하고 경쟁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뛰어난 화질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하지만 정작 HDTV 구현을 위한 고화질 카메라와 전송 표준의 혁신까진 한참 걸렸고요. 20년 뒤 마침내 HDTV가 대중화됐을 때, 필립스는 되레 25억 달러의 자산을 상각해야 했습니다.

결국 혁신은 ‘어떻게’ 못지않게 ‘언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강한 추진력을 발휘해 온갖 난관을 뚫고 혁신을 이뤄내는 영웅담에 열광하는데요. 진짜 리더라면 ‘생태계를 구성하는 공동의 혁신가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나’까지 계산해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 퍼즐이 놓이길 기다렸다가 단숨에 치고 나와서 MP3 시장에서 승리를 거둔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죠.

2008년 잡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은 꽤 천천히 일어납니다. 기술의 흐름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볼 수 있고, 어떤 흐름을 탈지 현명하게 선택해야 하죠.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수 있지만, 현명하게 선택하면 실제로는 꽤 천천히 전개됩니다. 몇년이 걸리죠.”

미쉐린과 화이자의 값비싼 실수
“고객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고객 관점에서 생각하라.” 흔히 이렇게 기업에 조언합니다. 고객을 생각한다는 건 분명 혁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부분인데요.

그런데 그 고객은 누구일까요? ‘타이어 제조사 고객=운전자, 제약사 고객=환자, 영화제작사 고객=관객’인 걸까요? 론 애드너 교수는 기업이 최종 소비자만 바라봐서는 혁신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제품이 최종 소비자에 다다르는 중간 과정에 있는 “모든 고객”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에 따르면 “최고의 제품이 실패하는 건 소비자가 선택할 기회가 없을 때”입니다.

세계적 타이어 제조사 프랑스 미쉐린의 실패 사례를 볼까요. 미쉐린은 7년의 개발 끝에 야심작 ‘PAX 시스템’을 2000년 선보였죠. 타이어가 펑크 나도 시속 88㎞로 200㎞까지 달릴 수 있는 신개념 런플랫 타이어였습니다. 미쉐린은 ”10년 후엔 PAX 외엔 다른 종류의 타이어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고요. 메르세데스 벤츠, 아우디, 르노, 혼다 같은 주요 자동차 제조사도 속속 이 타이어를 채택했죠.
타이어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꾼 혁신적 제품이었던 미쉐린의 PAX 시스템. 미쉐린 제공
타이어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꾼 혁신적 제품이었던 미쉐린의 PAX 시스템. 미쉐린 제공

하지만 시장의 열정은 빠르게 식어갔어요. 미쉐린이 간과했던 고객이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정비소였습니다. PAX 타이어는 워낙 혁신적인 제품이라 수리를 위해선 새로운 장비가 필요했는데요. 정비소 입장에선 그런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고요. 타이어 수리를 받지 못하게 된 운전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집단소송이 줄줄이 제기됩니다. 결국 2007년 미쉐린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PAX 사업을 중단해야 했죠.

이게 바로 ‘채택 사슬의 위험’입니다. 혁신가와 최종 소비자 사이엔 유통업체, 소매업체, 영업사원 같은 ‘중간자’가 있고요. 그중 단 한 곳에서라도 채택을 거부하면, 그 제품은 최종 소비자에 도달할 기회를 아예 잃고 말아요.

또 다른 초대형 실패 사례, 화이자의 ‘흡입형 인슐린’을 볼까요. 2000년대 초, 제약업계를 뜨겁게 달군 아이디어는 ‘주사 없는 인슐린’이었죠. 커다란 천식 흡입기처럼 생긴 ‘흡입형 인슐린’ 개발에 주요 제약사들이 앞다퉈 뛰어들었는데요.

2006년 1월, 화이자가 ‘엑수베라’를 출시하면서 경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화이자는 2010년까지 엑수베라가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거라 예상했죠. 초대형 블록버스터 신약의 탄생인 것처럼 보였어요.

한때 업계를 열광케 했던 화이자의 흡입형 인슐린 엑수베라의 지면 광고.
한때 업계를 열광케 했던 화이자의 흡입형 인슐린 엑수베라의 지면 광고.

하지만 2007년 10월, 출시한 지 불과 22개월 만에 화이자는 엑수베라 생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화이자는 28억 달러를 손실 처리해야 했죠. 제약업계 역사상 가장 큰 실패로 남았는데요.

도대체 왜? 화이자가 놓친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FDA는 엑수베라를 승인하면서 환자가 간단한 폐기능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요. 문제는 인슐린 처방권을 가진 내분비내과 전문의의 진료실엔 폐활량 측정기가 없단 점이었죠. 즉,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엑수베라를 처방하려면 일단 그 환자를 호흡기내과 의사에 보낸 다음, 다시 진료 예약을 잡아야 했어요. 그 번거로움을 감수할 전문의가 없었던 거죠.

혁신은 ‘윈윈윈윈’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미쉐린이 PAX 타이어 수리 기계를 정비소에 대거 깔았더라면? 화이자가 내분비내과 전문의 대신 폐활량 측정기가 이미 있는 일반의를 먼저 공략했더라면? 그럼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요.

이게 바로 론 애드너 교수가 ‘넓은 시야(The Wide Lens)’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새한 ‘MP맨’처럼 주변 기술이 문제일 땐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중간 고객이 채택을 거부하는 문제라면 그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신 기업이 직접 나서서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죠.

미국의 ‘디지털 시네마’ 도입 과정이 그 예인데요. 커다란 릴에 감긴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가며 영화를 상영했던 아날로그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이를 디지털화한 디지털 프로젝터가 최초로 출시된 게 1996년이었습니다. 1999년 뉴욕과 LA에선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필름 없이 디지털 프로젝터로 상영됐죠.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1의 디지털 상영은 디지털 시네마 시대의 전환점이 됐다.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1의 디지털 상영은 디지털 시네마 시대의 전환점이 됐다.

디지털 시네마는 영화 제작사가 막대한 필름 인쇄·운송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 혁신 기술입니다. 덕분에 배급사는 드디어 ‘전 세계 동시 개봉’이 가능해졌고요. 관객들은 한층 밝고 선명하고 몰입감 있는 화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원하던 혁신이었죠.

하지만 2006년까지 미국 영화관 스크린 중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용한 비중은 고작 5% 미만. 이 혁신에 유독 저항하는 연결고리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죠. 바로 비싼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서 설치해야 하는 영화관 소유주(극장주)였습니다. 안 그래도 극장은 운영 마진이 빠듯한데(극장의 주 수입은 관람료가 아닌 팝콘 판매), 스크린당 7만~10만 달러나 드는 업그레이드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병목 지점. 이걸 해결하기 위해 결국 영화 제작사(스튜디오)들이 나섰습니다. 제작사들이 기금을 마련해서 극장의 디지털 프로젝터 초기 구매 비용을 지원해주기 시작한 거죠. 이를 통해 극장주는 디지털 전환 비용의 약 80%를 보조받을 수 있게 됐고요. 디지털 시네마가 극장주에 더 이상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자, 급속도로 도입이 이뤄집니다. 혁신 생태계의 막힌 혈이 뚫린 거죠.

결국 혁신은 기업과 최종 소비자, 둘의 ‘윈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중간 참여자까지 포함한 모두의 ‘윈윈윈윈윈’이 돼야만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거죠. 혁신은 경주가 아니라 ‘퍼즐 맞추기’에 가까우니까요. 기업이 승리하려면 앞만 보고 빨리 뛰는 경주마가 아닌, 파트너까지 함께 뛰게 만드는 생태계 리더가 돼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겠지만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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