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에서 펼쳐진 이세돌 사범(9단)과 바둑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대국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단순한 바둑의 승패를 넘어 인류가 AI의 가능성과 마주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6년,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 구글 딥마인드 공동 창업자 겸 CEO가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세돌 사범과 10년 만에 재회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미래 글로벌 선도 국가로 꼽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가 구글 포 코리아에 참석했다 / 출처=IT동아
구글코리아는 4월 29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구글 포 코리아(Google for Korea) 2026’를 개최했다. 구글 포 코리아는 구글의 대표적인 연례 행사로, 올해는 ‘AI의 지난 10년과 미래 방향성’을 주제로 진행됐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를 포함해 윤구 구글코리아 사장, 이세돌 사범 등이 참석했다.
‘알파고 아버지’ 하사비스, 새로운 인류 번영 황금기 전망
이날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알파고 10년, 모두를 위한 AI의 비전’을 주제로 진행된 대담에서 “10년 전 서울에서 현대 AI 시대가 시작됐다. 이세돌 사범과 알파고의 대국 후 많은 진전을 봤다. (대국이)어제같기도 하고, 100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알파고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있는 데미스 하사비스 CEO / 출처=IT동아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알파고는 과학적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면서 알파고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실제로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 AI의 실용화를 이끌어왔다. 특히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2024년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AlphaFold)’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생명과학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범용인공지능(AGI) 시대의 파급력에 대해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과거 산업혁명보다 10배 더 큰 규모로 10배 더 빠르게 전개되는 혁신적 전환점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새로운 인류 번영의 황금기가 오지 않을까”라면서 알파폴드가 그 혁신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기대도 덧붙였다.
이세돌과 10년 만에 재회 “더 나은 인류 번영 이루길”
이번 행사의 핵심은 데미스 하사비스 CEO와 이세돌 사범의 만남이었다. 2016년 알파고 대국 이후 10년 만의 재회라 더 의미가 컸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와 이세돌 사범은 10년 만에 재회해 주목받았다 / 출처=IT동아 이세돌 사범은 “(알파고와의 대국은)인생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라며 “창의적인 바둑을 둔다고 생각했는데 (알파고와 대국 후)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AI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어야 했다.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알파고의 2국 37수와 이세돌 사범의 4국 78수를 회상하며 “37수는 AI의 창의성을, 78수는 인간의 직관을 각각 보여줬다”고 밝혔다. 이어 “이를 통해 더 나은 인류의 번영을 이루길 바란다. 미래는 인간의 직관과 기술의 파트너십이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구 사장도 개막사를 통해 의도적으로 두 장면을 대비시키면서 “37수는 실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파격적이고 관습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알파고 승부를 결정짓는 결정타이자 AI의 잠재력을 증명했던 이정표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78수는 창의성과 직관, 위기 속에서 답을 찾아낸 인간의 잠재력을 증명했던 수였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한 수야말로 AI 시대에 왜 사람이 여전히 중요한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에게 감사패를 받은 이세돌 사범 / 출처=IT동아 또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알파고 대전 10주년을 기념하며 이세돌 사범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10년 전 대국이 없었다면 알파고는 AI 역사의 각주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이세돌과의 대국이 있었기에 알파고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AI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알파고 10주년 기념, 구글의 전략적 한국 선택
구글이 알파고 10주년을 한국에서 기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AI 인프라 핵심인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이자, 제미나이 이용량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와 전략적 포석이 맞닿아 있는 지점인 셈이다. 또 구글의 이번 행보에는 경쟁사를 의식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픈AI는 국내 주요 기업들과 잇따라 협력 관계를 맺으며 한국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고, 앤트로픽 역시 국내 파트너십을 늘려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윤구 구글코리아 사장이 개막사를 하는 모습 / 출처=IT동아 윤구 사장은 이번 행사에서 한국 시장의 위상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제시했다. 그는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에서 구글의 AI 모델 ‘제미나이(Gemini)’ 이용량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시장이라고 밝히며 “한국 이용자 10명 중 8명은 AI 기술을 더 깊게 배우고 싶어 한다. AI를 자신의 성장을 돕는 파트너로 정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과의 협력 현황도 처음 구체화됐다. 윤구 사장에 따르면 구글은 삼성전자와는 차세대 XR 헤드셋 ‘갤럭시 XR’을 공동 개발 중이며, 젠틀몬스터와는 안드로이드 XR 기반 AI 글래스를 디자인 초기 단계부터 함께 설계하고 있다. 또 카카오와는 AI 서비스 ‘카나나’가 안드로이드 환경에서 최적의 성능을 구현할 수 있도록 협력을 진행 중이라고도 소개했다.
특히 윤구 사장은 통합 AI 스킬링 브랜드 ‘AI 올림’을 공식 발표해 주목받았다. 그는 “AI 올림은 ‘모두가 함께 배우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청년부터 기업, 개발자,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교육층을 포괄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이라며 물리적 거점인 ‘구글 AI 캠퍼스’도 함께 예고했다. 이어 “한국의 파트너사, 학계와 연구진, 청년, 기업들이 언제든지 모여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실행할 수 있는 한국 AI 혁신의 허브”가 될 것이라고 구글 AI 캠퍼스에 대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윤구 사장은 “한국인의 저력과 창의성은 AI 시대에 한국이 세계를 선도할 원동력”이라며 “구글코리아는 기술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한국의 AI 혁신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가 대담에 참여하고 있다 / 출처=IT동아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이번 방한 기간 이재명 대통령을 접견하거나 한국 학생과 기업을 직접 만나는 일정도 소화했다. 그는 “한국은 반도체 생산과 로보틱스 등 제조 산업이 아주 강력하고, 유수의 대학과 연구 기관도 많다”며 “(알파고 대국) 10년이 지난 시점에 돌아와 한국 정부와 협력하고 한국 기업과 새로운 기술로 협업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AI 모델 경쟁이 기술력뿐 아니라 생태계 구축 싸움으로 번지는 국면에서 구글이 알파고 10주년을 활용해 딥마인드의 브랜드 파워를 한국에서 재확인하려는 전략은 자연스럽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의 방한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다. ‘구글도 한국을 진지하게 본다’는 신호로 보는 업계 시각이 지배적이다.
구글 AI 역사부터 기술까지 한자리에
이번 행사에 앞서 공개된 AI 데모존에는 알파고 역사부터 최신 AI 기술까지 구글의 AI 여정이 펼쳐졌다. ▲제미나이(차세대 AI 모델) ▲나노 바나나(AI 이미지 생성 모델) ▲제미나이 라이브(실시간 멀티모달 AI) ▲리리아(AI 음악 생성 모델) ▲알파폴드(단백질 구조 예측) ▲어스 AI(기후재난 대응) 등 다양한 부스가 운영됐다. AI가 일상과 산업 현장으로 나오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구글의 AI 기술을 직접 체험하려는 참석자들로 행사 시작 전부터 북적였다.
AI 데모존에는 구글의 AI 여정이 펼쳐졌다 / 출처=IT동아 AI 데모존에서 가장 많은 발길을 붙잡은 곳은 제미나이 부스였다. 고급 초콜릿 판매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서는 제미나이가 취향을 분석해 디저트를 추천해줬다. 태블릿 화면에서 신뢰, 아이디어, 혁신 등 여러 키워드 중에 2가지를 선택하면 제미나이가 조합을 분석해 최적의 초콜릿을 추천해주는 방식이었다. 기자가 아이디어와 혁신을 선택하자 제미나이는 ‘프레시 모멘텀(Fresh Momentum)’이라는 이름의 디저트를 제안하며 ‘딸기의 산뜻함과 자스민의 향기가 만나 새로운 감각을 깨우듯, 구글 AI와 함께 당신의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어보세요’라는 설명이 나왔다. 추천 결과에 따라 실제 초콜릿을 맛볼 수 있도록 구성, AI의 추천이 실물 경험으로 이어져 흥미를 더했다.
알파고와 이세돌 사범의 대국 장면을 전시한 아카이브 공간 / 출처=IT동아 AI 데모존 입구에는 알파고와 이세돌 사범의 대국 장면을 전시한 아카이브 공간이 마련됐다. 특히 당시 2국의 37수 ‘창의성의 불꽃(A creative spark)’ 기보판이 조명과 함께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 걸린 문구는 ‘AlphaGo: A moment of inspiration(알파고: 영감의 순간)’으로 이번 행사 전체를 압축했다. 바둑판 위의 37수는 끝났지만, 그 영감이 만들어낼 다음 장은 이제 시작임을 알렸다.
데미스 하사비스 CEO를 포함해 글로벌 AI 수장들이 잇따라 서울을 찾고, 한국을 전략 거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흐름이 한국에 대한 의례적 관심인지, 아니면 진짜 판이 바뀌고 있는 신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10년 전 한국이 알파고 대국의 ‘무대’였다면, 지금은 글로벌 AI 시대의 ‘플레이어’로 호명되고 있다는 것. 그 차이가 이번 행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