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구의 인터‘스페이스’] 광화문 거리를 수놓는 초대형 스크린, 끝내 이에 합류할 수 없는 한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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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타임스퀘어’를 향하는 거리

광화문 사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 중 하나가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이다. 1919년 창간 이후 100년 넘게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지켜본 이 건물은, 광화문이라는 공간이 ’국가의 중심‘에서 ’도시의 일상‘으로 변하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매체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광화문 일대는 행정안전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는 ’광화문스퀘어‘ 미디어아트 구상, 그리고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 지정 이후 도심 건축물 외피에 디지털 미디어가 빠르게 도입되며 새로운 형태의 ’광화문 타임스퀘어‘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출처=동아일보
출처=동아일보


국가의 정문에서 시민의 무대로

광화문은 원래 이렇게 화려한 거리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이곳은 도성의 정문이자 국가 의례와 행정이 시작되는 정치·행정의 축이었다. 해방과 전쟁, 개발과 민주화 시위를 거치며 광화문은 국가의 시간과 시민의 시간이 겹쳐 쌓인 우리 현대사의 가장 밀도 높은 무대가 됐다.

2000년대 이후 차로를 줄이고 보행 공간을 넓히며, 광장은 점점 사람의 속도를 회복했다. 이제 이 거리는 ’청와대로 향하는 길‘만이 아니라, 도심을 오가는 시민의 감정과 일상이 머무는 ’생활의 무대‘다. 광화문은 ’국가의 전면‘에서 ’시민의 브라운관‘으로 서서히 전환되는 중이다.

LED가 도시의 표정이 되는 시대

이 변화는 광화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남 코엑스 일대의 미디어 파사드, 명동·해운대의 대형 스크린, 지역 문화 공간을 밝히는 공공 미디어아트까지, 한국 도시 전반이 지금 ’파사드=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도시의 외피는 더 이상 구조와 재료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콘텐츠·서사·기술·운영 시스템이 함께 건물의 표정을 만든다. 건축의 시대에서 건축과 기술, 콘텐츠가 결합된 시대로. 어떤 이들은 이를 ’시각적 장소성(visual placemaking)‘이라 부른다.

공간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보면, 미디어아트는 결국 ’빛과 이미지가 도시를 어떻게 기억하게 만드는가‘를 묻는 작업이다. 단순한 밝기 경쟁이 아닌 것이다.

출처=담장너머
출처=담장너머

필자가 속한 담장너머가 진행했던 배재학당 디지털 복원 전시 ’영원한 마음의 고향; 배재학당‘은 사라진 근대 건축을 빛과 프로젝션으로 되살린 프로젝트였다. 과거의 교육 공간을 현재의 감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것. 현존하지 않는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게 아니라, 그 건물이 품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과 서사를 공간 속에 다시 흐르게 하는 실험인 셈이다.

출처=담장너머
출처=담장너머

송파호수교 ’사랑해벽‘ 미디어아트 프로젝트는 또 다른 접근이었다. 도시의 일상적 구조물인 교량 하부를 감정적 메시지가 오가는 공공 스크린으로 전환했다. 물가를 따라 걷는 시민들의 동선과 시선을 고려해 빛과 색이 조금씩 변주되며, 도시가 개인의 감정 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탐구한 작업이었다.

이런 프로젝트들을 거치며 느낀 건 결국 하나다. 미디어아트는 도시의 외벽을 채우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장소 사이의 감정적 거리를 조정하는 장치라는 것. 광화문도 마찬가지다. 그저 ’밝은 거리‘를 넘어 누군가의 기억과 연결, 체험이 머무는 새로운 도시 장면을 만들고 있다.

‘제2기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의 조감도.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처럼 다채로운 광고물이 설치될 예정이다.

출처=행정안전부
출처=행정안전부


빛의 경쟁, 그리고 그 그림자

광화문 사거리를 기준으로 둘러보면, 최근 몇 년간 건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이는
건물‘이 되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KT 광화문 웨스트는 초대형 미디어월과 함께 AR 체험, K-팝 콘텐츠가 결합된 플래그십 공간을 조성하며 광장을 향해 적극적으로 ’쇼‘를 건다. 코리아나 호텔과 인근 빌딩 외벽에는 삼성·LG가 공급한 디지털 사이니지가 잇달아 점등되며 야간 경관을 LED 중심의 새로운 레이어로 덧칠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면 스크린은 공공 콘텐츠와 전시 홍보 영상을 반복 재생하며 ’국가의 역사‘를 디지털 이미지로 요약해 광장에 내보낸다. 광화문은 더 이상 ’정적인 기념비의 거리‘가 아니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거리로 재구성되는 중이다.

그러나 이 흐름에는 그림자도 드리운다. 초대형 LED 미디어월은 건물 외피를 통째로 막아버리는 방식으로 설치된다. 최근 한 건축 전문 매체는 미디어월 뒤편에서 빛과 바람, 바깥 풍경을 잃어버린 사무실 근로자들의 폐쇄감과 피로감 문제를 짚기도 했다. 즉 도시의 외피가 더 화려해질수록, 그 안에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호흡과 감각은 오히려 더 좁아진다.

교보빌딩, 끝내 미디어아트를 선택하지 않은 건물

1991년 시작된 ’광화문글판‘은 30년 넘게 계절마다 시와 문장을 갈아 달며 도심 한복판에 작은 문학관을 열어 왔다. 2020년 리모델링을 거치면서도 외관은 갈색 타일과 수평 띠창의 비례를 대부분 유지했고, 최근까지도 건물 외벽은 커다란 디지털 스크린이 아니라 시인의 한 문장, 혹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한 태극기 래핑처럼 상징적인 이미지와 메시지로 채워져 왔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서울시의 ’광화문스퀘어‘ 계획에 따라 교보빌딩 역시 디지털 전광판 설치 대상 건물에 포함됐고, 교보생명 내부에서는 오랜 상징물인 광화문글판과 새로 도입될 디지털 옥외광고물 사이의 충돌을 두고 신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어떤 건물은 이미 대형 스크린을 선택했고, 어떤 건물은 경관조명과 유리의 투명성으로 승부를 본다. 그 사이에서 교보빌딩은 “우리도 타임스퀘어의 한 디지털 조각이 될 것인가, 아니면 광화문글판이라는 느린 매체를 끝까지 지켜낼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과 마주 서 있다. 교보빌딩은 도시의 가장 앞선 무대에 서 있으면서도, 오래된 정체성을 한 번도 잃지 않은 특별한 위치에 있다.

교보빌딩의 광화문글판 / 출처=교보생명
교보빌딩의 광화문글판 / 출처=교보생명


스크린의 도시에서 ‘읽히는 건물’이 전하는 서정

광화문이 지금처럼 밝고 화려한 야경을 갖게 된 건 도시가 미디어를 선택한 결과다. 그 선택 덕분에 새로운 콘텐츠 산업과 야간 경제가 열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건물이 스크린이 되는 도시에서, 광화문 교보빌딩은 여전히 ’읽히는 건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광장 쪽 스크린과 KT 사옥의 입체 영상도 한 번씩 올려다보지만, 정작 마음에 남는 것은 갈색 타일 위에 놓인 한 문장,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같은 문구일지도 모른다.

교보빌딩은 도시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다. 도시의 ’로우파이(low-fi) 채널‘을 책임지는 건물에 가깝다. 모든 것이 과포화된 화면으로 몰려갈 때, 해상도를 낮춘 채 사람의 속도와 눈높이를 지켜주는 존재.

교보빌딩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 건물이 그동안 광화문에 남긴 건 분명하다. 스크린이 아닌 문장으로 소통하는 외벽. 광고가 아닌 위로와 기억을 전하는 파사드. 즉각적인 시청각 자극 대신 천천히 읽히는 도시의 감정…

도시는 계속해서 밝아질 것이고, 광화문스퀘어 계획은 앞으로도 더 많은 스크린을 세울 것이다. 그 속에서 교보빌딩이 어떤 얼굴을 선택하든, 우리가 이 건물을 바라볼 때 느끼는 서정은 아마 오래 남을 것이다.

LED가 도시를 덮는 시대에도 끝까지 한 문장의 힘을 믿어온 건물, 광화문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가장 아날로그한 미디어아트는, 어쩌면 교보빌딩일지 모른다.

정훈구 담장너머 대표 (plus82jh9@gmail.com)

담장너머의 공동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즈‘와 ’굿디자인 어워즈‘에 선정된 바 있으며, 다양한 공간기획 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인 공간과 경험을 제안, 구축하고 있다.

정리 / IT동아 이문규 기자 (munch@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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