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 고치러 가상현실 로그인… 실제 치료효과 입증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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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테크]
외출 어려운 광장공포증 환자들, 일상생활 재구성한 VR 속에서
‘눈 마주치기’ ‘커피 주문’ 등 훈련… 증상 크게 줄고 불안장애도 감소
어린이 시력 교정-물리 치료 등 최근 의료현장 VR 활용 증가세

연구진이 개발한 VR 시스템 ‘게임체인지’ 화면. 커피를 요청하거나 버스에 탑승하는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다양한 작업을 현실처럼 하도록 설계됐다. 옥스퍼드대 제공
연구진이 개발한 VR 시스템 ‘게임체인지’ 화면. 커피를 요청하거나 버스에 탑승하는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다양한 작업을 현실처럼 하도록 설계됐다. 옥스퍼드대 제공
도심 한복판 도로에 녹색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에 올라타자 여러 명의 승객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다. 내 몸은 보이지 않지만 둥둥 떠다니는 손이 보인다. 광장공포증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 설계된 가상현실(VR) 속 한 장면이다. 광장공포증은 넓게 트인 광장이나 공공장소, 급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에 빠지는 불안 장애다.

대니얼 프리먼 영국 옥스퍼드대 정신의학과 교수 연구진은 광장공포증을 개선할 수 있는 VR 시스템 ‘게임체인지(gameChange)’를 개발하고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테스트한 결과를 이달 초 국제학술지 ‘랜싯 정신의학’에 공개했다. 프리먼 교수는 “환자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VR 기술은 지금까지는 주로 게임이나 콘텐츠, 엔터테인먼트에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신질환 증상 치료는 물론이고 뇌졸중 등 중증 질환 환자들의 재활에 효과가 나타나면서 의료현장에서 쓰임새가 커지고 있다. 실제 환자의 증상을 개선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VR를 다양한 질환 치료에 활용하려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 버스도 못 탔던 환자가 버스 타고 외출
프리먼 교수 연구진은 외출에 어려움을 겪는 광장공포증 환자를 모집해 174명에게는 일상적인 치료와 VR 시스템 ‘게임체인지’ 치료를 병행하고, 172명에게는 일반 치료만 받게 한 뒤 효과를 분석했다.

게임체인지를 활용할 수 있는 174명은 6주 동안 30분 분량의 VR 시나리오 6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각 시나리오에 참가한 뒤 다른 참가자와 협력하는 과제도 수행하게 했다. 다만 모든 시나리오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조건은 아니었다.

게임체인지 내 시나리오는 가상 치료사의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면 다양한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참가자는 각 상황과 현장에서 커피를 요청하거나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더 가까이 접근하는 등 특정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

프리먼 교수는 “게임체인지 내 시나리오는 참가자가 실제 상황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거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며 “상황마다 참가자가 ‘이게 현실이 아니야,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어’라는 의식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 결과 6주 후 게임체인지를 활용한 그룹이 일반 치료만 받은 그룹에 비해 광장공포증이 유의미하게 줄어들고 불안장애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심각한 참가자의 경우 VR 치료 효과가 6개월 동안 지속됐다. 프리먼 교수는 “심각한 광장공포증을 지닌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쇼핑을 가거나 버스를 타는 것과 같은 실제 일상 활동을 평균 2회 더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VR 세계에서 무언가를 극복하면 현실 세계에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번 연구결과만큼 광장공포증 개선 효과를 나타낸 다른 실험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버스를 타고 아버지 묘지를 찾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참가자는 “VR 시스템을 활용한 뒤부터 자신감을 얻게 됐다”며 “이제 버스를 타고 아버지 묘지를 방문할 수 있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뒤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약시 치료, 뇌졸중 재활 등 영역 확대
의료진 수술과 환자 치료 교육 등으로 제한됐던 의료 현장에서의 VR 활용은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루미노피아’가 개발한 어린이 약시 개선 VR 치료법이 지난해 10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한쪽 눈의 시력이 약하고 교정이 잘 안 되는 약시는 시력이 좋은 반대편 눈을 가려 시력이 낮은 눈을 훈련시켜 치료한다. 루미노피아는 VR를 이용해 양쪽 눈에 다른 영상을 보여주고 뇌가 양쪽 눈을 보다 균형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지난해 9월 루미노피아가 공개한 임상3상 결과 어린이 1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교 시험에서 루미노피아의 VR 프로그램을 활용한 어린이 51명은 시력이 표준 시력에서 1.8단계 개선된 반면 비교 그룹은 0.8단계 개선되는 데 그쳤다.

국내에서는 의료진 수술 및 응급 처치 교육을 위한 VR 활용에 이어 최근에는 뇌졸중이나 노화로 인해 보행이 쉽지 않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재활 치료용 VR 기술도 나오고 있다. 강동경희대병원 의료진은 체중을 지지하는 장비와 VR 기술을 결합해 뇌졸중이나 치매 환자들이 보행 등 재활 치료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기자 reborn@donga.com
#마음의병치료#가상현실#게임체인지#vr#불안장애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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