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용의자의 알리바이, 사실일까?… “소지품에 묻은 흙은 알고 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입력 2021-07-12 03:00수정 2021-07-1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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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정교해진 ‘토양 포렌식’ 기술 주목
미국 해군범죄수사대(NCIS) 수사원들이 토양 분석을 위해 샘플을 채취하고 있다. 미국 자연자원보호청(NRCS) 제공
2007년 11월 호주 남부 도시 애들레이드에 사는 10세 여자 어린이가 납치된 뒤 성폭행을 당하는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집에서 훔친 신용카드를 사용한 28세 남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남성이 훔친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 외에 성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하면서 수사는 난항에 빠졌다.

호주 과학수사대(CSI)는 용의자 신발에 묻은 흙에서 단서를 찾았다. 수사팀은 여러 차례 피해자 집 주변을 샅샅이 훑어 토양 샘플을 채취해 용의자 신발에 남은 흙과 같은 성분의 흙을 찾는 데 성공했다. 이는 용의자와 피해자의 직접 접촉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채택됐고 용의자는 2009년 7월 미성년 성폭행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았다. 흙에서 범죄 흔적을 찾아내는 ‘토양 포렌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달 6일 열린 지구화학 분야 세계 최대 학회인 ‘골드슈미트 콘퍼런스’에서는 이보다 한 단계 발전한 토양 포렌식 방법이 공개됐다. 사건 현장을 찾아가 토양을 채취하던 방식에서 더 나아가 사전에 지역별 토양 특성을 지도와 함께 저장했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신발, 옷, 차량에서 채취한 샘플과 비교해 용의자의 동선을 추적하는 진일보한 방식이다.

○ 범인의 옷에 범죄 현장 위치 정보 남아
패트리스 드 카리타 호주 캔버라대 국립법의학연구센터 교수는 8일 이메일 인터뷰에서 “많은 국가가 광물 탐사와 토지 이용 의사 결정을 목적으로 토양 데이터베이스를 이미 구축해 놓고 있다”며 “데이터베이스와 범인 신발에 묻은 흙만 대조해도 충분히 기소가 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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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이나 DNA는 과학수사에서 범인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용의자의 신원을 알아내기 어려운 사례가 실제 현장에서 종종 일어난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아 있어도 용의자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모근이 남아있지 않으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다.

토양 포렌식은 이를 보완할 방법 중 하나로 2000년대 초 과학수사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토양에는 흙과 돌 외에도 동물과 식물에서 나온 유기물이 섞여 있다. 유기물과 무기물 종류는 수없이 많아 토양 성분도 사실상 무한한 조합을 이룬다. 불과 1m 떨어진 토양의 성분이 서로 다를 정도다. 벽돌과 유리조각처럼 인간이 만든 다양한 인공 물질들까지 토양에 섞이면서 위치에 따라 성분 차이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토양의 이런 특성은 신발, 옷 같은 개인 소지품이나 차량 외부 및 바퀴에 묻은 흙만 확인해도 범인이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알아낼 수 있게 했다. 범인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거짓으로 진술했는지 판별이 가능해진 것이다.

○ 수사 대상 지역 좁히는 데 도움
한 연구원이 신발 밑창의 흙을 채취하고 있다. 입자가 작은 진흙이나 모래는 쉽게 옷과 신발에 달라붙지만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영국 제임스허튼연구소 제공
특히 입자가 작은 진흙이나 모래는 쉽게 옷과 신발에 달라붙지만 눈에는 잘 안 띈다. 범인이 범행 직후 혈흔처럼 잘 띄는 흔적을 지울 수는 있지만 옷에 묻은 토양을 완벽히 제거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법과학자들은 푸리에변환적외선분석기(FTIR)라는 장치로 옷이나 신발에 파고든 토양을 찾고 있다. 시료에 백색 빛을 쬐인 뒤 반사되는 전체 파장을 이용해 물질의 화학적 구성을 분석하는 장치다.

X선 형광분광기도 활용되고 있다. 시료 표면에 엑스선을 쬐여 여기서 나온 형광 X선 색깔로 성분을 알아내는 장비다. 토양 시료가 흰색이나 회색빛을 띠면 석회 성분을 포함하고 검은색이나 회색빛을 띠면 각각 유기물과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다. 빨간색이나 갈색, 노란색을 띠면 토양에 철 화합물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카리타 교수팀은 북캔버라 일대 260km²에 이르는 지역에 대해 이런 토양 정보를 구축했다. 북캔버라 지역을 가로세로 각각 1km인 정사각형 격자(셀)로 나눠 토양 샘플을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무작위로 채취된 샘플 3개를 받아 어디서 수집된 것인지 추적했다. 연구팀은 비교 결과 전체 면적 260km² 가운데 최소 60%, 최대 90%에 이르는 지역을 제외할 수 있었다. 카리타 교수는 “상당수 국가는 이미 토양 데이터베이스가 잘 구축돼 있어 별도로 샘플을 채취할 필요가 없다”며 “범죄수사에 활용한다면 그만큼 경찰이 조사할 대상 지역을 좁히고 수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주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과 함께 과학수사 선진국 중 하나로 꼽힌다. 입국자들의 옷과 수하물, 신발, 여권에 묻어 있는 모래나 먼지를 분석해 테러 용의자 입국을 차단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관련 연구를 전담하고 있다. 한강에서 실종된 뒤 숨진 채 발견된 손정민 씨의 양말에 묻은 흙도 국과수가 분석했다. 정희선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 원장(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토양 포렌식 관련 장비나 기술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어 국내 기술력도 해외에 못지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토양 포렌식#범죄#알리바이#동아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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