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의 실록한의학]숙종의 불같은 성격을 다스린 ‘신선의 옷’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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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태반은 임신부의 자궁 안에서 태아의 영양 공급, 호흡, 배설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고대에서는 인간이 최초로 몸에 걸치는 가장 좋은 옷이라고 여겨 ‘신선의(神仙衣)’라고도 불렀다. 한방에선 약재로 쓰이는 태반을 자하거라고 부르는데 그 약용 기록은 중종실록에서 처음 나온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이은 왕비의 죽음과 조광조의 사사(賜死) 과정에서 생긴 스트레스로 몸져눕는다. 당시 약방제조였던 김안로와 장손순은 자하거를 먹고 중종이 완쾌하자 그 투약 경위와 약재의 효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건강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처음 편찮았을 때 자하거를 처방했는데, 워낙 신통하고 영험한 약이라 먹는 사람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방문(方文)에 따라 아뢰지 않았습니다.”

한의학이 주목하는 자하거의 가장 큰 효험은 항스트레스 작용. 동의보감 내경편 신문(神門)에는 ‘가슴이 뛰는 증상, 정신이 없는 증상, 말이 많으나 일관성이 없는 증상을 치료하는 데 효능이 탁월하다’라고 쓰여 있다. 본초강목에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하거의 첫째 효능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도 마찬가지.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는 가슴의 답답함, 심한 두통, 정신혼미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자하거 환약을 복용했고 인조의 부인인 장렬왕후 조씨도 얼굴에 기가 오르는 상기(上氣)와 신경쇠약 증상이 심해지자 자하거 환약을 먹었다. 인조 자신 또한 발바닥이 차가워지는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자하거를 복용했다. 순조도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불면증과 식욕부진, 사지무력, 피로, 정신혼미, 현기증 등 다양한 신경증과 소화불량증을 치료하기 위해 대조지황탕과 혼원단을 복용했는데, 이 두 처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약재가 바로 자하거였다.

불같은 성격의 숙종은 본래 성질이 찬 약재인 자하거가 잘 맞았는지 자주 복용했다. 심지어 태반을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겠다고 고집을 피운 기록도 있다. 약방제조들이 위생상의 문제를 들어 극구 만류하자 그때서야 고집을 꺾고 삶은 태반을 복용했다.

자하거의 약용 기록은 서양의학이 한의학을 앞지른다. 서양의학에선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 때로 약용의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한의학에선 중국 명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유교적 이념 때문이었다. 명대의 의서 본초강목에는 자하거의 약용을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하지만 명의 뒤를 이은 청대에 이르면 자하거는 ‘천하의 명약’을 만드는 약재로 사용됐다. 원기 보충의 최고 처방으로 알려진 ‘보천하거대조환’에도 들어갔다.

인물평은 사후에 해야 더 믿을 만하다 했던가. 자하거도 삭으면 그 본성이 드러난다. 자하거에 대한 동의보감의 마지막 기록은 ‘자하거를 땅속에 묻어 7∼8년이 지나 삭으면 물로 변하는데 어린아이의 단독(丹毒)과 모든 독을 주로 치료한다’는 것. 단독이 열성 피부염의 일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하거의 본성은 식히고 적셔주는 청열자음(淸熱滋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숙종#신선의 옷#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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