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인물]'도전게임왕' 필자 64세 양선희씨가 사는법

  • 입력 2002년 8월 11일 17시 57분


양선희씨가 온라인 게임 ‘레드문’(www.redmoon.co.kr)을 하고 있다. 이 게임에서 그는 채팅을 통해 젊은 게이머들에게 삶의 지혜도 나눠준다.(권주훈기자 kjh@donga.com)
양선희씨가 온라인 게임 ‘레드문’(www.redmoon.co.kr)을 하고 있다. 이 게임에서 그는 채팅을 통해 젊은 게이머들에게 삶의 지혜도 나눠준다.(권주훈기자 kjh@donga.com)
본보에 ‘양선희 할머니의 도전! 게임왕’ 칼럼을 인기리에 연재중인 양선희씨(64). 10대들도 하기 힘든 온라인 게임 ‘레드문’의 최고수 타이틀을 얻은 그는 요즘 “노년을 재미있게 보낸다”는 등 찬사를 받는다.

경기 김포에서 그가 운영하는 PC방 ‘인터넷 플라자’의 건물주는 건물 외벽에 ‘인기필자 양선희’라는 플래카드까지 내 걸 예정이다.

▼프롤로그▼

동아일보사의 요청을 받은 게임업체들은 60대∼70대 게이머를 찾아 나섰다. 각 사별로 고객 리스트의 주민등록번호를 검색해 필자를 찾았다. 제이씨엔터테인먼트사가 온라인게임 ‘레드문’(www.redmoon.co.kr)에서 양씨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밤을 새우며 게임을 하다가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진 뒤. 게이머들 사이에서 양씨의 아이디 ‘아부끄워라’는 유명해져 있었고, 게이머들은 그를 친할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양씨는 또 온라인 상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고 발랄하게 사이버 세계를 뛰어다니는 ‘한지화(그림)’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는 게임상에서 나누는 대화로 더욱 유명했다. 깊은 삶의 경험이 배어나는 그의 말은 젊은 게이머들에게 삶의 지침서가 되기도 했다.

PC방에서 담배피는 여고생이나 가출한 학생들에게 거침없이 “미친년” “망할놈”하며 혼을 냈다. 때로는 학교로 연락하기도 한다.

PC방과 온라인 게임에서 엄한 할머니로, 깊은 속내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로 ‘활약’하고 있는 그에게는 세월의 연륜과 온라인 세계가 이루는 조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꿈▼

1988년 평생 은행에서 근무해온 남편 장덕규씨(72)의 퇴직금이 입금되는 날. 며느리도 보고, 중형차 한 대 뽑아 수영 다니고 요리 배우러 다니고…. 그는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그러나 꿈은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통장의 잔고를 확인한 그는 놀랐다.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는 남편의 설명을 들은 양씨. 그러나 그는 그때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걱정 없이 살림했으니 이제는 내가 뛸 차례’라는 생각에 남편을 위로하며 조용히 통장을 접었다.

▼부잣집 딸과 안방마님▼

양씨는 충남 천안의 한 ‘뼈대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부자로 살아 온 집안. “경기 안성 이모네 집에 가면 사방 십리가 이모네 땅이었다”고 회상하는 양씨는 큰아버지가 서울로 이사갈 때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이 3일을 두고 마차로 쌀을 나른 기억도 있다.

식구들끼리도 만나면 반드시 큰절을 했다. “세상이 변했으니 이제 절 그만하자”고 식구끼리 합의한 게 불과 10년 전이다.

스스로를 ‘양반’으로 생각하고, 예절이 몸에 밴 그에게 시대의 변화는 참기 힘들었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친구들이 반지나 땅 자랑을 하는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집안 일만 돌보는 그를 친구들은 ‘안방마님’이라고 불렀다.

▼50세에 시작한 도전▼

40세때부터 절에 나갔다. 안방이 답답해서였다. 석가탄신일에는 절 떡을 들고 경찰서를 찾아가 경찰과 피의자에게 돌렸다.

40대에 시작한 종교 활동으로 그는 세상에 대해 편안한 안목을 갖게 됐다. “그래도 남편이 든든한 직장에 있고, 아이들 착하게 잘 자라는 덕분에 친구들의 땅이나 반지 자랑이 부럽지 않았고 남편의 퇴직금으로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심적 여유를 찾았다.

퇴직금이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을 안 그에게 오히려 여유는 큰 힘이 됐다. 남들은 “집 줄이고 씀씀이 줄여 그냥 옹색하게 살아라”고 권했다. 그러나 양씨는 세상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때 50세였다.

남편이 퇴직한 뒤 1여년간 함께 푹 쉬었다. 그리고 서울 삼성동에 슈퍼마켓을 열었다. ‘가게 열고 돈 벌고 하면 되지’.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건물주가 건물을 신축한다며 가게를 잠시 뺀 뒤 새 건물에 두배의 임대료를 내고 들어오라고 했다.

슈퍼마켓 운영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입고, 3년 전 김포로 이사해 지금의 PC방을 냈다.

양반집 귀한 자녀에서, 평범한 서민으로, 노후대책을 걱정하는 생활인이 된 양씨는 이제 세상과 맞설 자신이 생겼다. PC방을 연지 며칠만에 부랑배들이 들이닥쳐 “뭐야 이거”라며 위협했을 때 양씨는 “어따 대고 반말이야? 너 혓바닥 없어?” 거칠게 몰아냈다. 아는 사람하나 없이 발 붙인 김포 바닥에서 이젠 넉살좋게 이웃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동네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에필로그▼

신문에서 그를 알아 본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많이 왔다.

“부럽다, 어떻게 게임을 할 생각을 했니” “컴퓨터도 그럼 참 잘하겠네, 나도 좀 가르쳐 줘라.”

친구들의 공치사나 PC실력, 땅이나 돈이 양씨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의 앞에는 이제 막 재미붙인 ‘게임같은 삶’이 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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