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혁명]생명 신비 담긴 ‘블랙박스’ 풀었다

  • 입력 2000년 6월 26일 19시 34분


▼의미와 파장▼

‘이제는 포스트게놈 시대.’

게놈프로젝트는 일단 완결됐다. 1985년 미국 에너지부의 찰스 딜리시 박사가 인간게놈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과학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한지 16년, 과학자들이 정부관료를 설득해 미국 국립휴먼게놈프로젝트연구단(NHRRI)을 중심으로 18개국이 참가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출범한지 11년만의 결실이다.

그러나 이번 성과는 ‘유전자 세계’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첫 단추일 뿐이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답변을 찾아나서야 하는 ‘스핑크스의 침묵기’에 돌입한 것이다.

유전자 지도의 초안은 그려냈지만 이 그림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제부터 ‘애타는 심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또 지금까지 못지 않게 ‘포스트 게놈 시대’의 과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밝혀졌나〓사람의 세포는 약 60여조 개. 모든 세포핵에 23쌍의 염색체가 들어있고 염색체엔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암호문’이 있다. 이 암호문이 바로 DNA이고 한 세포 안에 있는 모든 암호문을 합쳐 인간게놈이라고 부른다.

암호문은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의 네 가지 염기로 이뤄지며 30억개가 쌍을 이뤄 배열돼 있다. 또 보통 암호문에는 적을 속이기 위해 아무런 의미 없는 글자 속에 ‘의미’를 숨겨두곤 하는데 게놈이라는 암호문에도 이런 ‘의미’가 숨어있다. 즉 아무런 기능이 없는 염기쌍 속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밝혀진 것은 30억개의 염기쌍이 어떻게 늘어서 있는지, 또 이 염기 배열 가운데 의미있는 유전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해서다. 그 뜻은 무엇인지, 유전자 이상에 따른 각종 질병에 대한 ‘작전을 짜고 전투를 하는 것’이 풀어야 할 과제다.

▽무엇이 뒤따르나〓지금까지의 작업은 게놈의 구조를 밝히는 ‘구조 게놈’(Structrual Genome)으로 요약된다면 ‘스핑크스의 침묵기’엔 게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밝히는 ‘기능 게놈’(Functional Genome)에 초점이 맞춰진다.

현재 유전자 10만개 중 대략적 기능이 밝혀진 것은 9000여개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우선 나머지 9만여개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만드는지 밝혀야 한다. 세포마다 유전자가 거의 똑같은 염기서열로 이뤄져 있는데 왜 간세포와 뇌세포 뼈세포 등 세포마다 서로 다른 단백질을 만드는지도 풀어야 할 과제. 유전자가 특정 질병이나 노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는 시간은 짧게 잡아도 앞으로 몇십년은 걸릴 것이란 전망이다.

▽생활은 어떻게 바뀌나〓1977년 미국의 스티브 잡스가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 ‘애플’을 선보였을 때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의 범람이나 경매 사이트의 등장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게놈프로제트의 완성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정확히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유전자와 관련된 ‘새로운 의학’이 의료활동의 중심에 자리잡으면서 인류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 확실하다.

우선 DNA칩이 등장해 진정한 예방의학이 가능해진다. DNA칩은 비슷한 기능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백, 수천개의 유전자를 손가락 마디만한 칩에 모아놓은 것. 여기에 사람의 혈액이나 살갗 안에서 특정 RNA를 추출해 반응시켜 본 결과를 갖고 질병에 걸렸는지 또는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환자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치료법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는 어떤 약이든 복용자의 10∼40%에게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지만 앞으로는 개인별 유전자의 차이에 따라 가장 알맞은 약을 골라 처방할 수 있다. 또 화학요법 수술 방사선치료 등 적합한 치료법을 고를 수도 있다.

유전자치료는 앞으로 의학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이다. 고장난 유전자를 잘라내거나 다른 유전자로 대체할 수 있고 특정 유전자가 유해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을 방해하는 약도 등장한다.

▽그림자도 있다〓유전자 시대가 ‘장밋빛 희망’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조짐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미국경영협회(AMA)의 조사에서 미국 중대형기업의 30%가 직원들의 유전정보를 입수하고 있으며 7%는 그 정보를 고용과 승진의 자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선 유전병에 걸릴 위험을 내세워 취업을 막거나 해고하는 사례가 잇따라 생기고 있으며 ‘유전자 불량자’는 보험에도 못 들고 있다. 맞선 대신 DNA선을 보고 배우자를 택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불량한 유전자를 가진 아기는 태어날 권리부터 원천적으로 박탈될지 모른다. 사회적 도덕적 법적인 차원에서도 이제는 새로운 규범이 시급한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국내 산업 영향▼

인간게놈프로젝트(HGP) 초안 발표로 침체 상태에 있던 국내 생명공학 산업도 어느 정도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HGP에 참여하지 않은데다 원천기술에 대한 투자도 미약해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한 국내 바이오 업계는 인간 유전체 염기서열 자료 공개를 계기로 열세를 만회할 전략을 세우고 있다.

올해 들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강화되고 바이오 분야에 대한 총 투자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서 산업이 점차 탄력을 얻고 있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관측.

과학기술부 산하 생명공학연구소의 ‘인간유전체 기능연구 사업단’은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발병하는 위암과 간암 정복에 1차적인 목표를 두고 HGP 발표 직후 연구과제 수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유향숙(兪香淑)사업단장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열세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질병에 초점을 맞춘다면 국내 연구의 독자성과 가치가 발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업단이 연구 과제로 선정한 분야는 △위암 및 간암 유전자 및 단백질의 초고속 발굴 △한국인 특이 단일염기변이(SNP) 발굴 △위암 간암 관련 유전체 기능연구 △한국인 호발성 결합 유전체 연구 등 4가지 분야.

전문가들은 이같은 기초 연구사업이 진전되고 산업기반이 확보되면 국내 대기업의 신약 개발과 벤처기업의 후속 게놈프로젝트(Post Genome Project)가 결실을 이룰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후속 게놈프로젝트는 연구 방법 자체가 상품이 되는 고부가가치 산업. 이 연구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1개의 기능이 분석되면 세계적 특허의 대상이 된다. 또 이 기능을 밝힐 연구 방법과 연구 장비 등도 회사에 막대한 수입을 올려줄 수 있다. 국내 벤처기업들은 △인간 유전자 정보를 입력해 실험과 진단에 사용할 바이오칩 개발 △ 초고속 SNP 발굴 및 분석 방법 △유전체 정보를 종합 분석해 신약개발의 자료를 제공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유전자의 단백질 생성원리 규명 등 첨단 분야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자금력이 월등한 대기업들도 지금까지의 신약 개발 경험을 토대로 꿈의 산업이라 불리는 개인 맞춤약 및 유전자치료법 개발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이 수십조원을 투자해 얻은 성과를 즉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 국내기업은 당장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 자료를 고가에 수입해야 할 형편이다. 또 수십년이 걸릴 수 있는 바이오 분야에 투자를 계속하면서 국내 실정에 적합한 사업 모델을 창출하는 것도 국내 기업이 짊어져야 할 과제다.

<정위용기자>viyonz@donga.com

▼초고속 해독 배경▼

‘빵, 빵, 빵.’

1998년 5월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에서는 생명의 비밀을 푸는 경주의 ‘속도전’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렸다. 유전학자 크레익 벤터가 민간기업 셀레라 제노믹스를 설립하면서 “3년 내 인간 게놈을 모두 밝히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

이들은 초고속 DNA분석기와 샷건(Shot Gun·산탄총) 방식을 무기로 들고 나왔다. 샷건 방식이란 DNA를 일정하게 잘라 분석한 뒤 나중에 붙여나가는 기존 방식과는 달리 DNA를 마구 잘라 분석한 뒤 슈퍼 컴퓨터로 모자이크하는 기술. 분석 전 배열 단계가 생략된 만큼 소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미국 등 18개국 350개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정보인 ‘인간게놈프로젝트(HGP)’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90년. 당시만 해도 연구를 꼼꼼히 진행해 15년 후인 2005년까지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라틴어로 ‘쾌속’을 뜻하는 셀레라의 ‘공격’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 HGP의 총책임자인 국립인간게놈연구소(NHGRI)의 프랜시스 콜린스 소장은 이때부터 서두르기 시작했다. 당시 예정시간의 반이 지났지만 NHGRI에서 밝힌 인간 염기서열은 3%도 되지 않았기 때문.

정확도는 속도에 눌려 뒤로 밀려났다. 분석 데이터를 10번 검증하던 것을 99년부터 3, 4번으로 줄였다. 그동안 축적된 기술에 대한 자신감도 밑바탕에 깔렸지만 무엇보다 셀레라의 속도전으로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HGP는 분석 속도를 3배로 높여 한시도 쉬지 않고 분당 1만2000개의 염기를 읽어나갔다. 그 결과 1998년 10월 콜린스는 2001년에는 첫 초안이 나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지난해 3월에는 2000년 봄이면 끝날 것이라며 예정시한을 두 번이나 앞당겼다. 3월9일에는 20억번째 염기 ‘T(티민)’를 확인했다. 인간 게놈의 첫 10억개를 분석하는 데 4년이 걸렸지만 그 다음 10억개를 해독하는 데는 넉 달이 걸린 것이다. 이같은 결과는 HGP측과 셀레라간의 경쟁, 슈퍼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한 것이다.

<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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