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65·끝〉여성이 운영권 가졌던 ‘채소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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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농가에서는 채소를 전혀 심지 않아 파 한 포기, 부추 한 단도 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정약용, 목민심서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재배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벼농사와 채소농사는 병행하기 어렵다. 채소 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

한양 도성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를 금지했다. 게다가 한양 근처의 산은 마구잡이 벌채로 민둥산이 되었으니 산나물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다. 따라서 한양 사람들이 먹는 채소는 모두 근교의 채소밭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이것을 도성 안으로 들여와 ‘채소전(菜蔬廛)’이라는 채소가게에서 판매하거나 행상이 팔러 다녔다. 채소전은 한양 시전(市廛) 가운데 여성이 운영권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가게 중 하나이며, 채소 행상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신윤복의 그림에도 생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채소 바구니를 어깨에 멘 여성 행상이 등장한다. 한양뿐만 아니라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다. 개성 사람 김사묵은 선죽교 옆에 채소밭을 일궜다. 먹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았는데, 채소가 귀해서 잘 팔렸다. 이렇게 번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온 식구가 먹고살았다고 하니, 제법 수지맞는 장사였던 모양이다.

채소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 조선 후기 국가 조달 물자의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에서 50여 종의 채소값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추 1근 가격이 쌀 2말, 파 한 단이 쌀 1되, 상추 한 단이 쌀 5홉이다.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도 아니었을 테니 이 정도면 귀한 음식이라고 하겠다. 채소 종자도 귀했다.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는 내농포(內農圃)의 채소 종자는 중국 가는 사신들이 진자점(榛子店·현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설치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채소가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 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 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 안산에 유덕상이라는 채식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만년에 채식을 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호를 만채(晩菜)라고 했다. 역시 채식주의자였던 친구 이용휴가 그를 위해 글을 지어줬다. “동물을 도살하면 피와 살점이 낭자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고 어진 마음을 베풀면 안 되겠는가. 고기를 먹어 오장육부에서 비린내와 썩은내가 나는 사람과 채소를 먹어 향기가 나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나 역시 아침저녁으로 채소 한 접시만 먹고 있다.”

이용휴의 ‘만채재기(晩菜齋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채식을 했던 이유는 고기가 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음식 문화가 채식 위주였던 이유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채소전#여속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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