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아랍어, 학교서 안 배워도 70%가 선택… “찍었는데 2등급”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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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제2외국어 ‘아랍어 로또’ 이대로 좋은가

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는 학교는 전국에서 6곳에 불과하지만 이번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한문 영역 선택자 10명 중 7명은 아랍어를 선택했을 정도로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사진은 올해 수능이 치러진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는 학교는 전국에서 6곳에 불과하지만 이번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한문 영역 선택자 10명 중 7명은 아랍어를 선택했을 정도로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사진은 올해 수능이 치러진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재수생 김태훈 군(19)은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인 지난해 본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베트남어로 시험을 쳤다. 외국어고 학생 등 중국어 실력이 좋은 학생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낯선 베트남어 시험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도 제2외국어 시험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 방과후학교로 베트남어 수업을 개설했다. 김 군은 “수능 직전까지 공부를 계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4등급이었다”고 말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올해 재수를 시작하면서 다시 아랍어로 바꿨다. 기초가 전혀 없어 철자부터 공부해야 했지만 점수 따기에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학원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수업을 듣고 복습도 했다. 하지만 공부는 쉽지 않았다. 김 군은 “철자 자체부터 어려워 한 주만 쉬어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군은 6월에 모의고사를 본 뒤부터는 아랍어 공부를 포기했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탐구 등에서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이 과목들에 시간을 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군은 “수능 원서를 내고 난 뒤부터 다시 아랍어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결국 다시 공부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수능에서 김 군은 50점 만점에 15점(원점수 기준)을 받았다. 그는 “몇 달을 공부하긴 했지만 문제지를 받아 보니 무척 낯설었다”며 “실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한두 문제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정성껏’ 찍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군이 아랍어에서 받은 등급은 전체 9등급 중 3등급. 김 군은 “고3 때 공부한 베트남어와 비교하면 아랍어는 학습량이 훨씬 적었는데, 성적은 좋게 나왔다”며 “아랍어가 등급 구분점수가 낮게 형성되기 때문에 투자한 시간과 비교해 점수를 받기에는 유리하다”고 말했다.

10명 중 7명 아랍어 선택

 수능 제2외국어·한문 영역의 9개 세부 과목 중 아랍어는 압도적으로 선택률이 높다. 올해 수능에서 제2외국어·한문 영역 시험을 신청한 9만4358명 중 6만5153명(69.0%)이 아랍어를 선택했다. 다음으로 신청자가 많은 과목인 일본어 신청자는 7874명(8.3%)에 그쳤고, 중국어(5200명·5.5%) 베트남어(5193명·5.5%)가 그 뒤를 이었다.

 수능에서 아랍어 과목이 추가된 것은 현재의 선택형 수능 체제가 도입된 2005학년도부터다. 첫해 아랍어 신청자는 중동 지역에서 살다온 학생 위주로 595명(0.5%)에 불과했다. 수능에 앞서 실시된 9월 모의고사에서는 아랍어 응시생이 단 1명에 그치기도 했다.

 초기에는 외면받는 과목이었지만 이것이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요인이 됐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조금만 공부하면 쉽게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응시생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2005학년도 0.5%에 불과하던 선택률은 꾸준히 증가해 2010∼2013학년도에는 40%대를 유지하는 등 단연 1위 제2외국어 과목으로 떠올랐다. 2014학년도에 베트남어가 등장하면서 수험생들이 잠시 베트남어에 몰리기도 했지만 베트남어가 상대적으로 어렵다고 소문나면서 다시 아랍어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2016학년도 아랍어 선택자가 51.6%에 달했고, 올해 수능에서는 10명 중 7명이 아랍어를 선택했다.

 아랍어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전통적인 제2외국어 과목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05학년도에 선택률이 42.7%(5만6265명)에 달했던 일본어는 올해 수능에서 8.3%(7874명)에 그쳤고, 중국어도 2005학년도 15.6%(2만585명)에서 2017학년도엔 5.5%(5200명)로 떨어졌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10년 전에는 10% 정도의 선택률을 보였지만 올해 수능에서는 1%대에 불과했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은 압도적으로 많지만 아랍어를 정규 수업시간에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다. 교육부에 따르면 특수목적고인 울산외국어고를 비롯해 6개 고교에서만 정규 교과로 아랍어를 편성하고 있다.

한 번호로 찍어도 ‘4등급’

 많은 수험생이 학교에선 배우지도 않는 아랍어를 선택해 시험을 보는 이유는 경쟁자들도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운이 좋으면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그래서 아랍어를 전혀 공부하지 않고 시험을 보는 경우가 상당하다. 김 군은 “철자조차 모르고 시험을 보는 학생도 많고, 겨우 철자 정도만 아는 경우도 많다”면서 “실제로 한 친구는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찍기만 해서 2등급을 받은 경우도 있어서 이런 것을 노리고 아랍어에 응시하는 친구가 많다”고 말했다.

 아랍어는 전체적으로 평균이 낮기 때문에 잘 찍기만 해도 나쁘지 않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이번 수능 아랍어 과목에서 30문항을 모두 5번으로 체크한 경우 원점수는 13점(50점 만점)이 나왔다. 표준점수로 환산하면 50점, 백분위는 64%, 등급으로는 4등급으로 나쁘지 않은 점수다.

 모든 문항을 2번으로 찍었을 때는 원점수 10점, 표준점수 46점, 백분위 36, 등급으로는 5등급이 나왔다. 원점수 10점을 받았을 경우 한문에서는 8등급, 독일어·스페인어·중국어·일본어 등은 7등급에 그치는 것과 비교하면 아랍어를 선택했을 때 확연히 등급이 높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2외국어·한문 영역 9과목 중 30문항을 모두 맞힌 수험생의 표준점수는 아랍어가 압도적으로 높다. 만점자의 표준점수가 높다는 것은 수험생 전체의 평균점수가 낮고, 수험생들 간 점수 차가 대체로 크지 않다는 의미다. 2017학년도 아랍어 표준점수 최고점은 100점이었지만 다른 8과목은 66∼79점에 불과했다. 베트남어 만점자의 표준점수가 79점이었고 러시아어 72점, 일본어 70점, 스페인어·한문 68점, 중국어·프랑스어 67점, 독일어 66점 등이었다.

 아랍어 1등급 구분점수(등급 컷)가 50점 만점(원점수 기준) 중 31점으로 표준점수는 75점이다. 아랍어에서는 대략 60% 정도만 맞히면 다른 과목에서 만점을 받은 것보다 높은 표준점수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이 필수인 서울대에는 2등급을 받으면 감점을 하지 않는데, 아랍어의 2등급 구분점수는 18점(원점수)에 불과하다. 서울대 지원자들도 아랍어를 선택하면 100점 만점에 36점만 맞으면 불리함이 전혀 없는 셈이다.

외고생 피하고 조용한 시험 분위기 위해 선택

 아랍어가 공부에 투자한 시간 대비 성적을 받기엔 유리하지만 워낙 낯선 언어여서 공부하기는 쉽지 않다고 수험생들은 입을 모았다. 올해 수능에서 아랍어 만점을 받은 엄경현 군(19)은 “아랍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것도 적응이 잘 안 되고 다 붙여 쓰기 때문에 필기하기도 어렵다”며 “진짜 마음먹고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고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에 많은 학생이 중간에 포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아랍어 만점을 받은 한주연 양(19)도 “아랍어는 꾸준히 공부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나중에 한꺼번에 따라잡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많은 학생이 아랍어로 쏠리는 것은 외국어고 학생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은 전국 대부분의 외국어고에서 제2외국어로 가르치는데, 일반고와 비교하면 수업 시수가 훨씬 많다. 일반고 학생이 외국어고 학생과의 경쟁을 피하려다 보니 제대로 배우는 학생이 별로 없는 아랍어를 선택한다는 것.

 한 양은 “외국어고에서 가르치는 언어나 해외에서 거주하다 온 학생들이 많은 언어, 마니아가 있는 과목 등 특수한 층이 형성되는 과목은 1등급을 받기 어렵다”며 “이런 층이 별로 없는 언어가 바로 아랍어”라고 설명했다.

 또 아랍어 선택자 중 상당수는 수능 시험장의 분위기 때문에 선택하기도 한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 시험을 보는 수험생은 외국어고 학생들 또는 이 영역 점수가 꼭 필요한 서울대 지원자 등이 많아 쉬는 시간에도 조용하고 긴장감이 있다는 것. 제2외국어는 신청만 하고 시험장에서 포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제2외국어 시험을 보는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다른 과목 시험을 보고 제2외국어는 포기하는 학생도 많다. 올해 수능에서도 아랍어 지원자는 6만5153명이었지만 실제 응시자는 5만2626명이었다.

 학생들이 오직 ‘점수’만을 위해 아랍어를 선택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용상 평가원 수능 기획분석실장은 “‘아랍어 로또’ 보도 등이 나오면서 학생들이 이왕이면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아랍어를 선택하자는 심리로 쏠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수능에서 해결하기보다는 교수·학습 측면에서 중장기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수능 제2외국어#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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