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달간 맞춘 토기 조각… 몽촌토성의 비밀을 밝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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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3회> 몽촌토성 발굴 박순발 교수
토기-기와 조각 수천 개 전수조사… 후배들과 박물관서 합숙하며 복원
고구려의 ‘네귀 달린 항아리’ 첫 발견… 박 교수, 실측부터 통계작업 병행
백제왕성의 높은 위상 밝혀내

박순발 충남대 교수가 28년 전 손수 발굴했던 몽촌토성 건물터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순발 충남대 교수가 28년 전 손수 발굴했던 몽촌토성 건물터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9년 1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 박물관. 몽촌토성에서 발굴한 토기 조각을 하나씩 붙여 나가던 박순발 조교(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 가운데 귀가 네 개나 달린 묘한 토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박순발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여느 백제 토기와 다른 유형임을 직감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복사한 중국 랴오닝(遼寧)대의 ‘국내성 발굴 보고서’(1984년 발간) 사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둥지둥 보고서를 찾아본 그는 무릎을 쳤다. 여기 실린 고구려 토기 사진과 몽촌토성 출토품의 기형(器形)이 서로 닮았던 것. 올림픽공원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몽촌토성 발굴에서 고구려 토기인 ‘네 귀 달린 긴 목 항아리(광구장경사이호·廣口長頸四耳壺)’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박순발은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1977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도 광구장경사이호라는 사실이 12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한때 백제 고분으로 알려진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몽촌토성과 더불어 한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대결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던 셈이다.

백제왕성 터인 몽촌토성에 고구려 토기가 묻혀 있으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1988년 6월 토기 편을 현장에서 발굴한 박순발조차 조각만 봐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른한 살 석사과정의 고고학도로 그해 몽촌토성 발굴에 나섰던 박순발의 회고. “토기와 기와 조각 수천 개를 전수조사해서 하나씩 복원해 나갔습니다. 서울대 고고학과 학부생 10명을 불러놓고 석 달간 박물관에서 먹고 자면서 퍼즐을 맞춰 나갔죠.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박순발은 1988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한기가 올라오는 박물관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아놓고 후배들과 합숙에 들어갔다. 발굴보고서 제출 시한이 1988년 12월로 임박했지만 그의 성격상 일부 유물만 조사하고 넘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 2∼4학년생이던 성정용(현 충북대 교수) 최종택(고려대 교수) 임상택(부산대 교수) 김장석(서울대 교수) 등을 모아놓고 토기 실측과 복원, 촬영, 현상 등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사진 현상은 박물관 화장실을 개조한 암실을 이용했다.

1980년대 당시 발굴 현장 모습(맨 위)과 이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인 ‘광구장경사이호’(맨 아래). 박순발 교수·서울대박물관 제공
1980년대 당시 발굴 현장 모습(맨 위)과 이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인 ‘광구장경사이호’(맨 아래). 박순발 교수·서울대박물관 제공
고분이 아닌 건물터 발굴 현장에서 토기 편을 모두 실측하고 복원한 것은 1980년대에는 극히 드물었다. 복원은커녕 측량도 하지 않은 토기 편이 박물관 수장고에 굴러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박순발의 집요한 전수조사 방식은 서울대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면서 체득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출토품을 모조리 조사하고 복원해 계통대로 유형을 분류해 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1985년 경기 용인 서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도자기 편을 정리해 보고서를 낼 때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박순발은 토기에 대한 실측과 복원에 그치지 않고 형태별로 세부적인 통계작업까지 병행했다. 1980년대 국내 고고학계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접목해 토기의 양식과 제조 시기를 정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특히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를 새긴 도기)가 3세기 중국 동오(東吳) 지역 등에서 제작됐다는 점에 착안해 몽촌토성이 3세기 후반 건립됐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현재 몽촌토성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박순발의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고학계는 박순발의 최대 강점을 폭넓은 공부에서 찾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박 교수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대금구)이 중국 동진에서 넘어온 사실을 규명했다”며 “고급 사치품인 중국 동진 자기(磁器) 출토품과 더불어 왕성으로서 몽촌토성의 위상을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는 따르는 법. 1980년대 몽촌토성 발굴에서 아쉬웠던 점을 묻자 박순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구가 복잡하게 중복된 동남지구에서 땅을 파서 만든 수혈(竪穴) 유구만 찾느라고 도로나 마당같이 지상에 조성된 유구를 놓친 게 안타까워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왕궁 터를 찾을 땐 이걸 꼭 유념했으면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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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박순발#백제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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