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기자의 酒변잡기]아내에게 보내는 주당의 편지

  • 입력 2004년 12월 30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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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달력에는 이제 단 하루가 남아 있소. 하루 24시간은 물리적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인데 1년을 마무리하는 날은 늘 느낌이 각별해요.

지난해 12월 31일이 생각나네요. 집으로 친구들을 불렀지. 술을 한잔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자고. 아직 결혼을 안 한 싱글만 3명이 왔었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캠코더로 새해 소망과 결심을 말하는 장면을 찍어두자는 제안에 다들 카메라 앞에서 한마디씩 했지요.

며칠 전 당신이 없을 때 그 테이프를 틀어놓고 혼자 봤다오. 화면에선 낯익은 얼굴들이 나와 각자 새해 소망을 얘기합디다. “새해에는 꼭 좋은 여자 만나서…”(그는 올해 몇 명의 여자와 만났다 헤어졌지), “취업하겠다”(그러고 보니 그는 상당히 좋은 직장을 잡았군), 그리고….

그러다 보니 문득 같이 있었지만 화면에는 안 나온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나의 아내인 당신 말이오.

돌이켜보면 결혼 후 집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지요. 큰길에서 멀어 술 마시고 택시 잡기가 쉬운 곳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그건 전적으로 당신의 공이 아니었을까.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늘 말없이 술상을 차려준 당신 말이오. 당신은 늘 좋은 친구로, 충실한 조언자로, 따뜻한 후원자로 내 곁에 있었소.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봄밤에 부슬비 내려 지붕 처마엔 빗물 듣는 소리,

노자는 한평생 이 소리를 사랑했다지.

베옷을 입고 등불 돋우니 잠을 이루지 못해,

아내와 마주앉아 잇달아 두세 잔 들이켜네.

―권필, ‘밤비(夜雨雜詠)’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벌이는 술자리도 좋지만 당신과 둘이 앉아 마시는 술도 매력적이오. 앞으론 자주 자리를 마련합시다. 술을 입에도 못 대는 당신은 또 잔만 받아놓고 있겠지만.

올해 마지막 밤에도 어김없이 친구들을 부르려고 하오. 다들 쉽기만 했던 한 해는 아니었다고 이야기하겠지. 나도 그랬다오. 때때로 힘이 빠지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느꼈지만 그걸 버티는 건 주변 사람들 덕분이라오. 동료들, 벗들, 가족들…. 그리고 누구보다 당신.

오늘도 녹화를 할 텐데 이번엔 당신도 뒤에만 있기 없기요. 우리 함께 새해 소망과 꿈을 얘기해봅시다. 사랑하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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