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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놀이와 예술]<15·끝>정리정돈 놀이

입력 2004-10-04 19:17업데이트 2009-10-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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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싸움이다. 어머니는 도대체 어수선한 것을 참지 못한다. 어린 시절 방에 플라스틱 모델을 늘어놓으면, 가차 없이 빗자루로 쓸어 상자에 털어 넣곤 하셨다.

이 과정에서 불쌍한 나의 병사들은 중상을 입기도 하고, 때로는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없어진 놈들은 가끔 쓰레기통 속에서 내 눈에 띄어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내게는 그것들이 예술적으로 연출한 전투장면의 미장센이지만, 어머니에게 그것은 기동을 불편하게 하는 거추장스러움일 뿐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전공이 미학이라서 그런지 글 한 번 쓰려면 미학, 철학, 미술사에 각종 화집 등 온갖 책들을 바닥에 늘어놓게 된다. 남들에게는 혼란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 카오스 속에서도 어떤 질서를 본다.


그 혼란스런 책들의 배열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나는 작업하는 데 큰 애로를 겪는다. 하물며 잠시 방을 비웠다가 돌아와서 그 모든 책들이 다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것을 볼 때의 낭패감이란.》

● 어지럽히기와 치우기, 그 해묵은 전쟁

재미있지 않은가? 내게 질서인 것이 어머니에게는 엔트로피(무질서) 상태이고, 어머니에게 질서인 것이 내게는 엔트로피 상태다. 질서를 향한 열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되, 무엇을 질서로 보느냐는 사람마다 달라진다. 아니, 이것은 개인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때문에 늘어놓고, 치우고, 다시 늘어놓고, 다시 치우는 실랑이는 영원히 계속된다. 하긴, 그게 또한 자연이 돌아가는 원리가 아닌가.

이 싸움이 내 대에서 끝나는 줄 알았다. 웬걸, 아들과 어머니의 게임은 이제 손자와 할머니의 게임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네 살 먹은 내 아들놈과 그 해묵은 싸움을 반복하고 있다. “야, 이게 사람 사는 방구석이냐?” 할머니의 눈에 손자놈이 밥 먹고 하는 짓이라곤 실내 질서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으앙, 할머니가 다 망가뜨렸어.” 손자의 눈에 할머니가 집에서 하는 일이란 오직 예술작품을 파괴하는 반달리즘뿐이다.

자석으로 된 블록이 있다. 그것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방바닥에 어지럽게 늘어놓는 것은 꼬마의 ‘놀이’다. 그것을 뜯어서 케이스 안에 다시 차곡차곡 집어넣는 것은 할머니의 ‘일.’ 행여 케이스에서 빈 자리가 생길세라 할머니는 없어진 블록을 찾아 탁자와 소파 밑까지 훑는다.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놀이’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번거로운 ‘일’이 된다. 한 사람은 재미있고, 다른 사람은 번거롭고, 이 얼마나 불평등한가? 혹시 어머니를 위한 놀이는 없을까?

● 예술작품을 정리 정돈하는 화가

우르주스 베얼리라는 사람이 있다. 코미디언, 엔터테이너, 디자이너를 겸한 스위스 태생의 예술가다. 최근에 그가 하는 놀이가 어딘지 어머니의 일을 닮았다. 먼저 그림①을 보라. 누구나 다 알다시피 아를르에 살던 시절 빈센트 반 고흐의 침실이다. 작업을 할 때의 내 방만큼이나 화가의 방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베얼리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어지러운 방을 말끔하게 치웠다. 의자와 탁자, 그리고 액자는 침대 위로 올리고, 그 밖의 잡다한 물건들은 침대 아래 감추었다. 무엇을 어디에 감추었을까. 찾아보라.

다음 ②번 그림은 피터 브뢰겔의 작품이다. 알 듯 모를 듯 온통 해괴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묘사가 이렇게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네덜란드의 속담들을 글자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란다. 가령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속담을 글자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보라.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실제로 어린 시절 이 속담을 처음 듣고 머리 속으로 배보다 더 큰 배꼽의 영상을 띄워놓고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한 장의 그림에 무려 100가지 속담이 들어있다고 한다. 마을광장이 그야말로 장바닥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베얼리가 장내 정리를 맡고 나섰다. 그러자 마을광장이 썰렁해졌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민방위 훈련 때 공습경보가 울리면 우리의 거리도 저렇게 변한다. 그리고 사람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이들은 한 무더기로 따로 모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도 나의 플라스틱 병정들을 저렇게 무더기로 일괄 처리해 버리곤 하셨다.

●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

베얼리의 이런 작업은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의 ‘종달새의 노래’ 같은 추상성이 강한 작품이라고 예외가 없다. ‘종달새의 노래’는 제목과 달리 정작 종달새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로 구성된 작품이다. 베얼리는 그림을 구성하는 기하학 무늬를 해체한 뒤 형태와 색깔별로 분류해 가지런히 쌓아올린다. 마치 블록으로 만든 조형물을 해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로의 그림이 우리 아이가 블록을 가지고 연출한 마루바닥의 광경을 닮았다면 베얼리의 그림은 우리 어머니가 케이스 속에 깔끔히 치워놓은 블록들의 모습을 닮았다.

“예술을 정리한다.” 기발하지 않은가. (우리 어머니도 혹시 방을 정리하는 것을 ‘놀이’로 즐기고 계실까) 베얼리는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아침, 빵을 사러 가다가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이 이제까지 책 두 권 분량. 하지만 앞으로 그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이 작품이라고 어질러놓은 것이 어디 한 둘인가. 그 모든 것을 다 정리하려면 인생을 온전히 바쳐도 모자랄 터. 앞으로 심심할 틈은 없겠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 보라. ‘일’과 ‘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일’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진중권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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