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용중/‘守舊’벗어야 진정한 보수다

  • 입력 2004년 7월 18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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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진보의 시대다. 전쟁과 분열과 고통의 세기를 마감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과 발전을 예고하는 큰 막이 열리는 시기다. 이는 세계사가 증명하고 있는 당위이며 실존이다. 진보와 보수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좌우 이념이 이상적 세계가 어떠한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합의라면, 진보와 보수는 이상 세계를 건설하고 운용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다. 따라서 보수를 우파, 진보를 좌파로 분리하는 것은 본질을 오도하는 단순 도식이다. 진보와 보수는 한 사회 속에서 가치의 척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20세기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결코 좌파이념 자체와 진보적 세계관의 쇠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변화를 거부하고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수구적 태도가 낳은 당연한 귀결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제창한 ‘제3의 길’도 좌우의 이념 문제라기보다 20세기 말 영국이 처한 국제정치상의 특수한 입장을 반영한 제언이다. 성장과 복지, 세계화와 정보화는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안이다. 좌파는 복지만 생각하고 우파는 성장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이념시계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좌파적 성향이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가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설사 한나라당이 집권했다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크게 거스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진정한 보수 세력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보수란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보수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수의 상당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수구적 성격을 가진 집단이다. 이들이 이런 관점에 머물 경우, 낡은 이념의 포로가 됐다가 결국 몰락을 맞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수구적 사회주의 세력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국민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2만달러 고지를 향해 질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여정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 친일과 국가보안법의 부정적 유산은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혹자는 미래를 논의하자면서 왜 과거 청산에만 ‘올인’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도외시한 채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컴퓨터에 잔존하는 바이러스를 퇴치하지 않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은 당명을 바꾸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로서 국민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적극적으로 민족을 배신한 자,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유린한 인적·제도적 요소의 쇄신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전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의무이며 당위다.

한나라당이 또 한번 죽지 않는 길은 진보적 마인드를 수용해 수구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도 그들이 표방했던 ‘진보적 시대정신’의 구현이라는 초심을 잃지 말기 바란다. 진보의 핵심은 나와 다름을 포용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데에 있다.

이용중 동국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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