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밑줄긋기]‘나’를 초월한 삶의 방정식 찾기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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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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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벚꽃송이는 드물지. 그 한 송이를 찾아 평생을 소비할 수도 있지만, 헛된 삶은 아니라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가쓰모토가 알그렌에게 -

‘라스트 사무라이’(DVD·워너 브러더스)에서 사무라이 가쓰모토가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그의 눈에 비친 마지막 세상은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이다. 자주권을 앗아가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천황을 섬기던 사무라이인 그의 유언은 비장한 결의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대신 벚꽃송이에 바치는 찬사였다. “완벽해!”

이 장면에서 가쓰모토는 마치 사무라이가 아니라 완벽한 벚꽃송이를 찾아 헤매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천황이든 벚꽃송이든 평생 헌신해온 대상을 위해 자신을 바쳤으니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해야 할까.

가쓰모토야 그렇다 치고 마지막 사무라이가 된 알그렌(톰 크루즈)은 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따라나선 걸까. 미국인인 그에게 천황은 섬겨야 할 대상도 아니고 일본의 근대화 추진 세력과 저항 세력의 대립은 남의 싸움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이 영화는 알그렌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에 몰두하는’ 사무라이들에게 매혹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알그렌을 사로잡은 것은 그처럼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무라이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그의 열정의 이유는 열정 그 자체다. 무언가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하는 ‘태도’에 반한 것이다.

늘 계획하고 반성하고 후회하며 ‘나’에 몰두하는 숱한 사람들과 달리 ‘나’를 초월해 행위에 몰두하며 무언가에 전념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는 매혹적이다. 어느 책은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다. 그렇게 몰두할 만한 대상을 찾을 수가 없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어서 헤매는 사람들에겐 ‘미쳐야 미친다’는 부럽고 질투 나는 이야기다.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알그렌도 사무라이들을 보며 그런 선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데, 억지로 미쳐지겠는가. 현실에서 알그렌처럼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지만, 의지로 의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굳게 마음먹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굳은 마음이 먹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왜 무엇엔가 미쳐보겠다는 마음이 먹어지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미칠 수 없는, 미쳐지지 않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사소한 행위에 대한 몰입의 훈련,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이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거나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건 그만큼 거기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계속 달리고 싶다는 마음은 지루한 달리기 훈련을 거듭한 사람들에게만 생겨나듯, 가만히 있는 사람에겐 열망도 저절로 찾아와주지 않는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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