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94>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0월 30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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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상장군, 아니 되겠습니다. 이곳은 잠시 버려두고 먼저 좌군(左軍)을 구해야 합니다. 저대로 두면 좌군은 무너지고 맙니다.”

부장 하나가 항우에게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항우가 못들은 척 오추마(烏추馬)를 박차 앞으로 내달으며 소리쳤다.

“지면 죽음이 있을 뿐,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이냐? 스스로 구하지 못하면 아무도 구해줄 수 없다. 한 눈 팔지 말고 눈앞의 적이나 물리쳐라. 우선 섭간의 군사부터 온전히 짓뭉개 우리 자신부터 온전히 구해놓고 보자!”

그리고는 더욱 매섭게 섭간이 이끌고 있는 진군(秦軍)을 몰아쳤다. 그러잖아도 네 토막이 나서 마소 몰리듯 이리저리 몰리던 진군이 그 기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장졸을 가리지 않고 한목숨 건지기 위해 달아나기 바빴다.

항우는 그런 진군을 십리나 쫓아버린 뒤에야 되돌아서서 장졸들에게 외쳤다.

“자 이제 좌군을 구하러 가자! 그들을 구하는 것이 우리를 스스로 구하는 일이다”

항우가 군사를 되돌려 용도(甬道) 쪽으로 되돌아갔을 때, 이미 좌군은 소각의 대군에게 몰려 쫓기는 중이었다. 의지하고 있던 언덕을 버리고 달아나는 초군(楚軍)을 소각의 군사들이 사태 나듯 덮쳐 가는데 갑자기 한 떼의 인마가 붉은 회오리처럼 다가들었다. 항우와 그가 이끄는 8000의 강동병(江東兵)이었다.

앞서 밀고 나오던 진장(秦將) 소각의 군사들은 먼저 항우와 강동병의 형색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자기들보다 세배나 많은 적군을 짓부수어 십리나 쫓아버리고 오는 길이라 장졸이 하나같이 피를 뒤집어쓴 꼴이었다. 하지만 방금 이긴 다음이라 그 기세는 세차고도 날랬다. 진군이 그들을 붉은 회오리 같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항우의 군사들은 적을 위협하는 고함이나 엄포는 물론 저희 편의 기세를 북돋우는 함성 한마디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똑바로 달려와 진군의 앞머리를 받아쳤다.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르고 난 군사들 같지 않게 매서운 반격이었다.

진군도 이긴 기세가 있어 그대로 밀고 들기는 했으나 강동병들을 고조시키고 있는 일당백(一當百)의 기개를 당해내지 못했다. 잠깐 동안에 진군의 맨 앞줄은 거의가 처참한 시체로 변하고, 그 피가 들판을 붉게 적셨다.

“겁내지 말라! 머릿수가 바로 힘은 아니다. 다시 한번 강동 남아의 기상을 떨쳐 보여라!”

항우가 그렇게 군사들을 격려하며 앞장서서 무인지경 내닫듯 적진을 휩쓸었다.

멀리서부터 악귀 같은 강동병의 형색에 질려 주춤주춤하던 진군은 앞서 내닫던 저희편이 비로 쓸리듯 몰살을 당하자 바로 기세가 꺾여버렸다. 나타난 구원병이 얼마인지, 쫓겨간 적의 상태는 어떠한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서 부장(副將) 조특(趙特)이 승세를 탄답시고 대군을 계속 앞으로 모니, 내몰리는 쪽과 쫓겨오는 쪽이 부딪혀 진군은 저희끼리 큰 혼란에 빠졌다.

그때 다시 경포와 종리매가 각기 쫓기던 군사를 수습해 되돌아오고 용저와 포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머릿수에서까지 밀리게된 소각의 군사들은 거꾸로 쫓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창칼을 버리고 달아나는 사졸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초나라 군사들이 승리를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오래잖아 멀리 달아난 줄 알았던 섭간이 다시 패군을 수습해 소각을 도우러 온 까닭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싸움에 지고 쫓겨갔던 놈들이다. 겁먹은 진나라 개들이다.”

항우가 보검까지 뽑아들고 소리높이 군사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소각과 섭간 모두 한번 싸움에 져서 쫓기기는 해도 워낙 거느린 군사가 많았다. 흩어져 달아나던 셋 중에 겨우 둘을 모아온 꼴인데도 양편을 합치니 항우가 거느린 군사보다는 머릿수가 많았다.

거기서 다시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소간 머릿수가 많다해도 대의와 투지에서 진군은 초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특히 항우와 강동병은 진군에게는 거의 악몽이었다. 그들이 피를 뒤집어쓴 채 눈을 부릅뜨고 마주쳐오면 진군들은 제대로 창칼을 맞대보지도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끝내 항우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한 진군이 무턱대고 저희 편 왕리의 대군이 있는 쪽으로 달아난 것은 그 날 한나절이 지난 뒤였다. 원래는 두 갈래로 길을 나누어 왔던 소각과 섭간은 한 덩이가 되어 북쪽을 바라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하지만 급한 추격을 벗어나 흩어져 쫓기던 군사들을 수습해놓고 보니 둘 모두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 두 사람이 합쳐 10만이 넘는 군사를 거느리고도 7만도 안되는 초나라 잡병을 당해내지 못했으니 실로 부끄럽소. 엄한 군법이 용서하지 않으려니와, 명색 대진(大秦)의 장수로서 차마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구려.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병기와 갑주를 정비한 뒤에 다시 한번 결판을 내보아야겠소. 왕장군에게로 가는 것은 그 뒤라도 늦지 않소.”

소각이 진채를 얽으며 그렇게 결연히 말하자 섭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이다. 그렇게 해봅시다.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하루만 거둬들여도 초군과 다시 한번 싸워볼 만한 군세를 모을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왕 장군에게 파발을 띄워 3만만 빌어와도 오늘 우리가 받은 수모는 되돌려 줄 수 있소이다!”

이에 소각과 섭간은 달아나기를 멈추고 항우군과 거록성(鋸鹿城) 중간쯤에 진채를 내렸다. 그리고 전날 싸움으로 대오를 잃고 흩어져 전장을 떠도는 저희 편 군사를 모아들임과 아울러 왕리에게도 파발을 띄워 군사 3만을 빌렸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대전 방식이 아직도 초나라 군사의 세 곱절은 되는 진나라 대군을 다시 몇 갈래로 쪼개 차례로 항우 앞에 내보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틀 뒤였다. 그 새 6만의 군사를 긁어모은 소각과 섭간이 왕리가 보낼 3만을 후군(後軍)으로 믿고 기세 좋게 밀고 나왔다. 하지만 항우가 싸움이 그들의 뜻대로 되도록 놓아두지를 않았다.

“저것들이 또 머릿수만 믿고 밀고들 모양이다. 거기 말려들었다가는 군세가 약한 우리가 고단해질 뿐만 아니라 사람을 많이 상하게 된다. 내닫고 물러나는 빠르기를 저들의 배로 하고 힘을 하나로 모아치고 듦으로써 저들의 많은 머릿수를 쓸모없게 만들자!”

싸우러 나서기 전에 항우가 장졸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렇게 그날 싸움의 큰 모양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경포와 종리매 용저 포장군을 한꺼번에 불러내 명을 내렸다.

“나는 소각의 군사를 맞고 장군들은 섭간의 군사를 맞아 싸우되, 싸움을 끌어 군사들간의 난전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되오. 당양군은 바로 섭간을 찾아 적진으로 뛰어들고 다른 장군들도 모두 처음부터 적장들을 노려 그들부터 꺾고 싸움을 시작합시다. 나는 오늘 반드시 소각을 죽여 그 기세로 일거에 승패를 결정짓겠소!”

이어 갑옷을 여미고 투구 끈을 단단히 맨 항우는 훌쩍 말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일찌감치 진문(陣門) 앞으로 달려나가 적군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소각과 섭간이 이끈 6만의 진군이 이틀 전에 여지없이 뭉그러져 달아난 군사들 같지 않게 기세를 뽐내며 다가왔다. 오래잖아 왕리의 3만 군사가 이르러 뒤를 받쳐 주리라는 게 더욱 그들을 자신 있게 만든 듯했다. 소각도 그날은 진두(陳頭)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이나 거듭 낭패를 당하면서, 드디어 이번에 온 구원병은 지금까지 와있는 제후들의 군대와는 다름을 느낀 까닭이었다.

“싸움터에도 예가 있는 법. 군대가 창칼을 맞대면서 장수들이 서로의 이름을 모르다니 예가 아니다. 나는 진(秦) 전장군(前將軍) 소각이다. 적장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섭간이 희끗한 수염을 날리며 초군 쪽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그가 끼고 있는 자루 달린 큰 칼이 자못 위맹(威猛)스러워 보였다. 항우가 오추마를 박차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나는 대초(大楚)의 상장군 항우다. 천명을 받들어 진을 멸하러 왔으니 진장(秦將) 소각은 어서 목을 내어놓아라!”

말뿐만 아니라 그대로 허리에서 보검을 뽑아들고 똑바로 소각을 향해 달려나갔다. 항우가 그렇게 달려나가자 약속이나 한 듯 다른 초나라 장수들도 일제히 창칼을 꼬나들고 함성과 함께 진나라 진채로 밀고 들었다. 특히 경포는 먹으로 글자를 떠 험악한 얼굴을 더욱 무섭게 찌푸리며 외쳐댔다.

“섭간은 어디 있느냐?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내 칼을 한번 받아보아라!”

그뒤를 따르는 다른 장수들도 모두 경포처럼 각기 노리는 적장이 하나씩 있는 듯했다. 저마다 점찍어둔 적장을 싸움터로 불러냈다. 머릿수만 믿고 기세를 올리던 진군에게는 좀 뜻밖의 개전(開戰) 방식이었다.

오추마가 워낙 빠른데다 아무런 막힘없이 내달아 항우는 금세 소각의 진채 앞에 이르렀다. 소각을 둘러싸고 섰던 부장(部將)들이 놀라 그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때 소각이 큰 칼을 움켜잡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저 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한번 알아봐야겠다!”

싸움터에서 늙은 데다 항우가 그렇게 몰아오는 속셈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 소각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기세 좋게 말을 몰아 문기(門旗) 바깥으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 창을 끼고 소각의 말을 앞질러가며 소리쳤다

“장군. 이 싸움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저 어린놈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소각이 보니 부장(副將) 조특이었다. 전날 싸움을 맡았다가 군사만 꺾인 걸 만회한답시고 나선 것이었으나 실은 황천길을 재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놈!”

벼락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빠른 바람처럼 다가온 항우가 휘두르는 칼에 조특이 어깨를 찍혀 말 아래로 떨어졌다. 고함소리에 반나마 얼이 빠져 허둥대다 창 한번 제대로 내질러 보지 못하고 놀란 혼이 되고 만 것이었다.

눈앞에서 그 끔찍한 꼴을 본 소각은 그제야 자신이 나선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돌아서기에는 늦어 하는 수 없이 큰칼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말머리를 돌린 항우가 그런 소각을 노려 이번에는 보검을 수평으로 겨누었다.

“오너라! 이 주둥이 노란 어린놈[황구소아]아.”

소각이 단번에 항우를 쪼개놓을 듯 큰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몸을 말 등에 눕히듯 젖혀 그 한 칼을 피한 항우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보검을 내질렀다. 이어 두 마리 말이 엇갈리며 어디를 어떻게 찔렸는지 소각이 큰칼을 떨어뜨리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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