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사회]<4>여성노인의 현주소

  • 입력 2003년 1월 23일 21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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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평 전세방에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사는 정순옥 할머니(가명·77). 전남 해남 출신으로 20대 초 결혼하면서 서울로 왔다. 4평도 채 안 되는 전세방에서 정부가 주는 생계비와 경로연금 등 월 40만원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20년 전부터는 자식과도 연락이 끊겨 의지할 사람이 없다. 가끔 지역 복지관 직원이 반찬을 가져오고, ‘독거노인 주치의 맺기 운동본부’ 소속의 의사가 찾아와 진찰을 해주는 게 전부다.

▼복지센터에서…올해 91세인 강희영 할머니(가명)는 서울 근교의 A노인복지센터에서 지낸다. 15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과도 연락이 끊겨 친구와 함께 지내다 지난해 10월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이곳에 왔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만 올 수 있는 이 복지센터는 무료로 150여명의 노인 중 130명가량이 강 할머니처럼 오갈 데 없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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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경기 부천시에 사는 한모씨(71·여)는 4남매를 모두 출가시킨 뒤 직접 운영해 오던 슈퍼마켓마저 4년 전에 그만뒀다. 지금은 손자 손녀를 데리고 놀이터에 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일요일에 교회를 찾는 것이 유일한 ‘개인 용무’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 노인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이다.》

▽노인문제는 여성문제=지난해 12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 도쿄도지사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여성 노인을 자극하는 발언을 해 여성단체가 발끈한 적이 있다.

“여성이 생식능력을 잃고도 살아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긴상 자매(100세 이상 살며 일본의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쌍둥이 할머니)의 나이 때까지 사는 것은 지구에 심각한 폐해다.”

이 발언은 남편과 자녀를 위해 평생을 바친 여성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도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까.

노인문제는 곧 여성문제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통계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2000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은 337만2000여명으로 이 중 여성이 61.8%(208만4000명)나 된다.

노인 인구 가운데 여성이 훨씬 많은 건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의 평균 수명은 79.5세, 남성은 72.1세로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7년 이상을 더 산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질병에 시달리는 비율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훨씬 높은 게 노인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여성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우선 고령일수록 배우자가 없는 여성이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65∼69세의 남자 노인은 93.9%가 배우자가 있으나 여성은 43.8%뿐이다. 70∼74세 노인 중 배우자가 있는 남성은 86.2%, 여성은 27.2%이고 75세 이상의 경우는 남성이 75.1%, 여성이 11.6%이다.

남편의 사회활동을 돕고 자녀양육에 신경 쓰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정작 본인이 늙어서는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일거리가 없고 즐기지도 못한다=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강남여성인력개발센터. 한달 평균 400여명의 여성이 조리 건강관리 외국어 컴퓨터 등의 강좌를 듣지만 60대 이상 노인은 20명이 채 안 된다.

센터 관계자는 “여성 노인에게 유용한 강좌가 적지 않은데도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 취업, 교육, 사회참여 기회가 남성보다 적었던 탓에 많은 여성이 노후를 보람 있게 보내지 못한다. 정부와 기업 또한 여성 노인의 재취업과 자기계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여성노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2.7%로 같은 연령대 남성 노인(42.1%)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 농어축산업 종사비율이 58.3%, 단순 노무직이 28.3%여서 고용상태가 남성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여성 노인이 빈곤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 비율을 봐도 알 수 있다. 20대와 30대에서는 남녀가 비슷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65세 이상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3배 정도 많다.

▽여성 노인을 배려해야 한다=정부는 노인의 재고용 촉진을 위해 1991년 기업에 채용을 권장하는 노인의 직종을 선정하고 고령자의무채용비율을 정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고령자고용촉진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라 노인에게 적합한 직종으로 소독방역원, 교통정리원, 복지관보조원, 인력개발 또는 창업지원 컨설턴트 등 80가지가 제시됐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에게 적합지 않은 단순 노무직이나 전문직이어서 여성 노인에겐 별 도움이 못되고 있다.

노인을 위한 취업상담과 알선, 교육을 담당하는 노인취업알선센터 역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을 통한 여성 노인의 취업은 남성에 비해 극히 저조한 실정이다.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국민연금제도도 보완이 필요한 부분. 이혼한 여성은 ‘분할연금제’에 따라 남편이 가입한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지만 재혼하면 연금을 나눌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진다.

한국여성개발원 장혜경(張惠敬) 연구위원은 “정부의 노인복지정책이 여성 노인의 노후 소득뿐만 아니라 건강관리와 평생교육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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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김태현 성신여대교수·가족문화소비자학

캐서린 브라운은 미국 아이오와주의 디모인에 사는 60대 중반의 여성이다. 20여년 전 이혼하고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혼자 살고 있다.

남편에게서 받은 위자료에다 식당과 백화점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혼자 살면서 규칙적이고 균형된 식사를 하지 못해 비만이 심하다.

여기에다 무기력에서 비롯된 우울증에 시달려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최근에 조금 생기를 되찾았다. 시 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리슨 투 유(Listen to You)’ 서비스를 이용하고 나서였다. 이 서비스는 상담 요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해결방법을 함께 논의하는 것.

복지센터에서는 또 동년배 노인과 함께 오락을 즐기고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우울증 비만 성문제에 대한 상담이 가능하다.

일리노이주 어배나에 사는 매리안 벨몬트. 역시 60대 중반으로 최근 3년간 집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남편이 숨진 뒤 딸과 함께 살아왔는데 딸이 결혼하면서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크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집을 팔고 부근의 노인전용 콘도미니엄으로 옮겼다. 새 콘도미니엄은 노인에게 맞게 설계된 데다 집을 처분하면서 돈이 남아 전보다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노인전용 콘도미니엄으로 이사가도록 조언한 곳은 ‘어배나 여성복지관’이었다. 이 복지관은 부동산 전문가를 초청해 혼자 사는 여성 노인에게 정기적으로 자산평가 및 관리방안에 대해 상담하고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워싱턴주 이삭의 베리우드 양로원은 시애틀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데다 공기가 맑아 노인이 살기에는 매우 적합한 곳이다.

이 양로원에는 130명이 사는데 그중 홀로된 노인 여성이 82명이다. 올해 82세인 앤 할머니는 남편이 숨진 1989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 젊었을 때 비서였던 그녀는 남편이 미리 들어둔 보험과 연금 덕에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베리우드 양로원은 식당 미용실 수영장 오락실 게임룸 도서관 등을 갖추고 있다. 쇼핑, 박물관 견학, 공연 관람을 위해 외출할 때는 교통편을 제공하며 재테크와 건강 상담도 해준다.

무엇보다 앤 할머니를 즐겁게 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활동 프로그램이다. 지역 유명 인사와 대화를 나누는 티타임, 성경 공부, 주민생일파티 초청, 사교댄스 등 혼자 사는 노인에게 활력을 주는 프로그램이 많다.

김태현(성신여대 교수·가족문화소비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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