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맨]디지털 vs 아날로그

  • 입력 1999년 10월 4일 18시 38분


종합상사인 D사의 박모대리(30). 최근 인터넷에 새로 오픈한 전자상거래 장터 발표회를 앞두고 업계 관계자 60여명에게 E메일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런데 발표회 당일, 초청장을 받은 관계자 60여명 중 겨우 15명만이 참가했으니…. 박대리를 지켜보던 한모부장(45)은 혀를 끌끌 차며 그 자리에서 친한 사람들 20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 박대리가 보낸 초청장 받았지?”

잠시 후 전화를 받은 사람 중 정확히 17명이 ‘자리를 빛냈고’ 자칫 ‘망가질 뻔’ 했던 행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사람있고 컴퓨터있지!

클릭 한 번 만으로 60여명에게 동시에 초청장을 보낼 수 있다는 매력. 박대리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 움직여 주는 대로 빈틈 없이 일처리를 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뱉어 낸 결과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깜박한 것.

컴맹이어서 은근히 무시해왔던 한부장이 끈끈한 정과 오랜 연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본 박대리는 “아날로그 세대와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인 힘’도 키워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고 반성.

▼세상이 바뀌었는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ANY4U’의 강호수사장(28). 최근 A출판사로부터 교육용 CD롬타이틀을 만들어 달라는 제의를 받은 그는 며칠간 고민 끝에 거절했다.

“CD롬 타이틀은 어떤 내용물과 기능을 얼마만큼 넣느냐에 따라 제작비가 달라진다”고 누누히 설명했는데도 40대인 A사측 대표는 “다∼ 알겠는데, 65분짜리로 만들어 주쇼. 거, 분당 얼마요?”라는 말만 되풀이 한 것.

▼누가 잘못했다구?

디지털맨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고 있는 ‘아날로그맨’인 한솔PCS의 김형걸팀장(37). 그래도 좌절의 순간은 있었다.

“이대리 어디 갔어?”

아침 11시가 넘도록 출근하지 않는 이모대리(31).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로 연락을 한 김팀장은 그만 맥이 빠졌다.

“야! 어떻게 된거야? 너 지금 어디야?”

“팀장님, 저 여름 휴가잖아요. 어제 오후에 휴가원 결재 올린 것 안 보셨어요?”

아차! 전자결재란을 들여다 보지 않았으니….

▼‘디지로그’

전문가들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역들을 ‘온정파’, ‘386파’와 ‘마니아’로 구분한다.

합리적 사고보다는 친족 학연 지연에 얽매이는 온정파, 합리주의와 이성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했지만 공동체의식과 비판의식에 사로잡힌 386, ‘예’ ‘아니오’의 두 가지 코드밖에 모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공동체의식이나 정과는 거리가 먼 90년대 학번의 마니아. 온정파와 386이 뒤섞인 아날로그세대와, 386과 마니아가 섞인 디지털세대의 복잡한 갈등구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강사 라도삼씨(인터넷철학박사)는 “이 갈등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21세기 새 패러다임인 ‘디지털문명’속에서 우리사회의 경쟁력이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자칫 아날로그세대에게 덤볐다가는 ‘다치기’쉬운 디지털맨,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지만 빠른 시대변화를 따라 잡지 못해 헉헉대는 아날로그세대. 디지털맨의 창조력, 도전정신, 전문성이 아날로그맨의 위세에 눌려 ‘양철북’이 될 우려를 없애는 게 시대의 과제.

라박사는 “디지털맨은 정신적 유아기의 ‘피터팬’이기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몸을 던진다”며 아날로그세대는 아무리 그들이 미워보이더라도 끌어 안고 21세기 디지털문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디지털맨에게는 “네트워크 상의 다양한 가치를 아날로그세대와 공유, ‘아날로그’가 디지털은 못되더라도 ‘디지로그’는 되도록 도우며 디지털문명을 앞당겨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이면서. -끝-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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