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 여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한 한방화장품 포장지에는 ‘영어’로 브랜드명이 표기돼 있다. 상표만 보면 외국 브랜드 같지만 놀랍게도 이는 ‘한국산’이다.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설화수의 한자 ‘雪花秀’와 한글 ‘탄력크림’을 긁어서 지운 뒤 ‘Sulwhasoo’라는 영문자만 남기는 것이다. ‘The History of’ 영문 한 줄 달랑 표기된 화장품도 인기가 만만치 않다. LG생활건강 후의 한자 ‘后’를 지우고 나면 뜻도 모호한 영어 문구만 남는다. 그래도 화장품을 좀 안다는 북한 여성들은 이 제품이 모두 오리지널 한국산이란 걸 잘 안다.
최근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화장품은 일본이나 미국·유럽 화장품에 비해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산 화장품이 북한 시장에서 거래되려면 한국산 티가 나지 않게 화장품 용기나 포장지에서 한글은 지워야 한다. 북한에서 한국산 화장품은 수입 금지 품목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품 유통업자들은 단속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용기의 글자를 인위적으로 긁어내 영문 표기만 남긴다.
한자도 마찬가지다. 한문으로 표기된 화장품은 품질이 떨어지는 중국산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글자를 긁어낸다. 중국산 화장품 중에는 한국산 화장품의 포장 용기를 그대로 베낀 ‘짝퉁’이 상당하다. 하지만 이런 제품은 북한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중개상들은 자신이 거래하는 중국·조선족 상인들에게 한자가 적힌 한국 화장품은 아예 빼고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실정이다. ‘짝퉁’이 가장 많은 화장품은 다름 아닌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화장품 인기
북한의 각별한 한국 화장품 사랑은 ‘해당회관에 등장한 라네즈’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2013년 4월 28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당시)가 아내 이설주와 함께 평양의 쇼핑 시설인 해당회관을 방문한 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해당 사진을 보면 백화점 화장품 코너를 둘러보는 김정은 제1비서의 왼편으로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라네즈’ 매장 간판이 보인다. 북한 전문가들은 아모레퍼시픽이 북한에 수출하는 제품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 수출한 제품이 북한으로 재수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북한 백화점 실무자들이 라네즈 브랜드가 영어로 표기돼 있어 외국산 브랜드로 착각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물론 브랜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막연히 한국산 화장품을 찾는 여성도 많지만, 최근에는 브랜드명이나 효능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특정 화장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이 중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와 LG생활건강의 후, 숨37도 같은 한방화장품이 가장 인기다. 이설주가 설화수를 애용한다는 내용은 이미 보도된 바 있는데,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두 사람 외에도 북한 고위층 여성 대부분은 설화수를 쓴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국산 화장품, 북한 근로자 5년치 월급과 맞먹어
한국산 화장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주로 권력 핵심 계층이거나 상당한 재력가라 할 수 있다. 고위 간부층은 설령 한국 화장품을 쓰는 게 문제가 되더라도 해결할 능력이 있고, 비싼 가격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산 화장품은 북한산이나 중국산보다 2~3배 비싸다. 북한산 살결물(스킨), 물크림(로션) 2종 세트가 북한 화폐로 6만~8만 원인 데 반해 한국산 스킨, 로션 2종 세트는 18만 원에 거래된다. 이는 북한 일반 근로자가 월급(3000원 수준)을 한 푼도 쓰지 않고 5년 동안 모아야 하는 돈이다.
이제는 계층을 떠나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한국 화장품을 살 수 있다고 한다. 한국산 화장품 밀수입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마주한 중국 단둥(丹東)이나 선양(瀋陽)에는 한국 화장품의 상표를 손질해 외국 제품으로 둔갑시킨 뒤 북한 업자에게 넘기는 일이 다반사다. 설사 단속에 걸려도 “서구 브랜드로 착각했다”고 하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한국 화장품 유통 과정은 다음과 같다. 보통 북한의 무역회사에서 중국인이나 조선족 중개상에게 주문하면 또 다른 조선족 보따리상이 국내 화장품 도매상과 거래해 제품을 가져간다. 수량이 적을 땐 개인 간 거래로 몰래 들여오지만 수량이 많으면 세관을 통과해야 한다. 유통업자들은 북한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화장품 상자 포장에 들어 있는 상품 설명서는 잠깐 뺐다가 시장에서 팔 때 다시 넣는다고 한다. 물론 은밀하게 거래되는 제품이 진짜 한국산인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해당 제품의 용기를 따로 구매해 가짜 화장품을 넣어 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국 화장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은 북한 암시장 형태인 장마당(시장)이다. 화장품 코너 매대 위에는 주로 북한 화장품이 진열돼 있다. 평양화장품공장이나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만든 고가의 제품부터 지방에서 만든 상표 없는 화장품까지 다양하다. 한국산 화장품은 매대 아래 다른 수입산 화장품과 함께 숨어 있다. 아무리 장마당이 암시장이라고 해도 한국 화장품을 대놓고 팔 수 없기 때문에 매대 아래에 물건을 숨겨놨다가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몰래 판다. 한국산 제품에 대한 북한 당국의 단속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요즘은 화장품 장사꾼들이 집에서 일대일로 거래를 하거나,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형태도 늘고 있다. 결국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한국산 화장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한국산 화장품 받으면 “시집 잘 갔다” 소리 들어
고가의 한국 화장품은 고위층 접대용이나 뇌물용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때는 절대로 ‘짝퉁’이면 안 되기에 주로 중국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한국산 화장품을 확보한다. 중간 브로커인 중국인 무역상이나 조선족 중개상이 한국인 도매상으로부터 물건을 받았는지도 따로 확인한다.
북한에서 화장품은 흔하지 않은 인기 혼수품이다. 흔히 신의주화장품공장이나 평양화장품공장에서 나온 제품들을 혼수로 마련하는데, 제품 질이 그리 좋지 않아 피부가 예민한 사람들은 뾰루지 같은 부작용이 나곤 한다. 그나마 이런 화장품도 값이 비싸다. 더군다나 이들 화장품 공장은 주민들에게 지급되는 하사품이나 해외 수출용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어 일반인은 공장 관계자와 친분이 있어야 화장품을 살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혼수로 화장품을 받는 것 자체가 신부에겐 큰 선물이다. 최근에는 한국산 화장품 수요가 늘면서 예물 중에서도 북한산, 한국산, 중국산 중 한국산 화장품을 받은 신부가 가장 시집을 잘 갔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반면 북한산을 받으면 ‘보통’, 중국산을 받으면 ‘고생문이 열렸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고.
에센스·크림·세럼 등 다양한 종류에 매료
한국 화장품의 어떤 점이 북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평양국립민족예술단 출신 한 탈북인사는 “한국산 화장품은 기초 제품 종류가 다양한 데다 저렴한 라인부터 고급 라인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 북한 여성들 처지에서는 신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주로 살결물과 물크림을 바른 뒤 유분기 있는 크림으로 기초화장을 마무리한다. 크림이라고 해봤자 영양크림, 밤크림(나이트크림), 미백크림이 전부다. 반면 한국산 기초화장품은 스킨부터 로션, 아이케어 라인, 에센스, 세럼, 앰풀, 수분크림, 보습크림, 안티에이징크림, 영양크림, 미백크림, 리프팅 제품, 자외선 차단제, 미스트, 팩까지 제품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과거에는 ‘단계별 스킨케어’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던 북한 여성들이 한국 화장품을 접하고부터는 스킨과 로션을 바른 후 에센스와 아이크림, 영양크림 등 몇 개의 화장품을 더 바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일회용 영양 마스크 팩도 붙이는 등 점점 자본주의 국가의 화장 문화가 정착되는 분위기다.
북한 여성들이 한국 화장품 중에서 가장 감탄하는 제품은 일명 ‘기능성 화장품’이다. 보습은 물론 피부 재생, 주름 개선, 노화 방지에 탁월한 세럼, 에센스, 탄력크림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이런 제품들을 바른 뒤 색조 화장을 하면 유·수분 밸런스가 맞아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의 밀착감이 높아져 화장이 뜨지 않는 걸 최고의 장점으로 꼽는다고 한다.
북한은 남한보다 자외선 강도가 높고 북서풍이 차고 강해 피부가 쉽게 타고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빠진 피부를 다시 좋게 만드는 피부 재생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탈북인사 최모 씨는 “최근 평양 여성들의 얼굴이 화사해진 건 한국 화장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눈 화장하는 북한 여성들
북한 화장품은 화학 재료보다는 천연 재료를 많이 이용한다. 북한 봄향기합작회사의 대표 브랜드 ‘봄향기’는 개성고려인삼 추출물에 수십 가지의 한방 약재가 함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북한 여성들 사이에서도 고급 제품으로 통한다. 이처럼 한방화장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에 한국산 한방화장품은 ‘최고 중의 최고’ 대접을 받는다. 최씨는 “북한 화장품 중에는 봄향기가 최고지만, 설화수나 후 같은 한국 한방화장품과는 품질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산 화장품 용기는 튼튼하고 디자인이 고급스러워 특히 영양크림은 화장품을 다 쓰고도 버리지 않고 소품을 담는 통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 화장품 회사들도 화장품 용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황금색 포장 등 예전보다 한결 세련돼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한 물자가 북한으로 대량 지원되면서 당시 북한에서는 한국산 ‘삐야’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삐야는 비비(BB)크림을 뜻한다.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삐야를 바르면 얼굴이 덜 타고 잡티도 가릴 수 있어 2000년대 후반부터 고위층과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요즘에는 삐야뿐 아니라 아이섀도, 아이라인, 마스카라, 립스틱 등 한국산 색조 화장품도 인기라고 한다. 지금까지 색조 화장품은 프랑스나 일본산이 높이 평가받았는데, 최근에는 한국산 색조 화장품을 더욱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사실 이런 눈 화장은 과거 북한 여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를 두고 북한 전문가들은 ‘집단주의에 의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라고 평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한에서 눈 화장은 연예인이나 무대에 서는 배우 등 특수계층의 여성들이 하는 화장법으로 여겨 터부시했던 게 사실”이라며 “과거에는 하지 않던 색조 화장을 그것도 일반 여성들이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판 설화수’ 가능할까?
반영구 화장도 북한 여성의 관심 사항 중 하나다. 북한 여성들도 한국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침마다 눈썹 그리는 게 귀찮아 문신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갈매기 눈썹이 유행했지만 요즘은 한국 여성들처럼 일자형 눈썹이 유행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한류 영향이 크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눈썹이 대부분 자연스러운 일자 눈썹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문신 작업은 주로 개인 미용실에서 행해지는데, 이때 사용하는 문신 도구도 중국을 통해 넘어온 한국산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문신으로 큰 돈을 버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한국 화장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북한 여성들이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여성들이 얼굴 윤곽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하이라이터나 셰이딩 제품은 북한에서 별 인기가 없다. 북한에서는 여전히 보름달처럼 동그란 얼굴을 미인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느덧 북한 내에서도 화장품 산업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해 7월 신의주화장품공장을 시찰한 김정은 위원장은 현장에서 ‘제품의 질을 높이고 소비자 기호와 특성에 맞는 제품들을 개발해나갈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욱 교수는 “북한도 여성 화장품 수요가 날로 증가하는 현실을 전 세계 언론이나 내부 보고를 통해 파악했을 것이다. 평소 정책적으로 국산화를 강조하고 있는 김정은은 기존 화장품의 품질을 높여 ‘북한판 설화수’를 만들어 외화벌이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수준이 한국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이 나서서 화장품 품질 제고에 힘쓰라고 하지만 품질 개선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정부가 나서서 북한 주민들에게 자국산 화장품을 쓰라고 해도 한국산 화장품이 인기인 지금의 분위기를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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