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南과 北에서 투표를 해 보니

  • 동아일보

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탈북자인 기자는 북한에서 두 번의 선거를 겪었다. 북한의 선거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뿐이다. 두 선거가 무슨 선거였는지, 대의원이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결과는 100% 참가, 100% 찬성이었을 것이다. 참, 요즘엔 멋쩍은지 참가율을 99.97%로 발표하던데, 어쨌든 찬성률은 100%이다. 투표장에서 표 하나를 주고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투표함에 넣게 하니 반대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두 선거의 추억은 완전히 상반된다. 김일성대 시절의 첫 번째 선거는 괜찮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나는 공사에 동원됐는데, 선거날 모처럼 휴식을 할 수 있었고 기숙사 식당에선 맛있는 특식이 세 끼 나왔다. 무엇보다 가장 신 났던 건 오후부터 저녁까지 광장 무도회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클럽 문화가 없는 북한에서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이 몸을 풀 수 있는 때는 몇몇 명절에 무도회를 할 때뿐이다. 잘하면 여자친구도 생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젊은 남녀 누구나 제일 좋은 옷에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를 신고 무도회장에 나타났다. 투표 결과 같은 것은 누구의 안중에도 없었다.

두 번째 선거는 대학 졸업 후 어느 겨울 독감으로 40도의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불참 이유 같은 것은 따지지 않기에 하늘땅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무슨 정신으로 투표장에 갔다 왔는지 모른다. 비틀거리며 투표장에 갔다고 충성심을 높이 평가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죽지 않는 한 참가해야 하는 것이 투표니까. 그 바람에 일주일은 더 앓았던 것 같다.

한국에 와서 맞은 첫 대통령 선거 때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으며 매우 감격했다.

“아,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나라에 왔구나.”

그런데 지금은?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서 살다 남쪽에 와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나 같은 사람은 투표 때마다 항상 감개무량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감격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멋모르고 했던 첫 투표를 제외하면 이후부턴 선거 때마다 몇 달 동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 선택의 자유가 만든 선택의 스트레스라니. 그냥 노동당이 정해 준 사람 찍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마치 내 손에 국운(國運)이라도 달린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아무리 따져 봐도 이 후보는 이게 마음에 들고, 저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쨌든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별것 아닌 개인적 선택에도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늘 고민하고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하니 너무 어렵다. 더구나 내가 믿어야 할 사람은 정치인이다.

공약을 꼼꼼히 따져 보고 선택하고 싶지만 항상 게도 가재도 다 잡겠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뜬구름뿐이다. 공약을 일목요연하게 한꺼번에 정리한 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언론은 후보들이 툭툭 던지는 말과 돌발사건을 쫓기에 정신없다. 나보고 다 챙기라고?

찍은 후보가 낙선했을 때의 실망감, 찍은 후보가 당선돼 기대에 어긋날 때 느껴야 할 실망감까지 다 내가 투표의 대가로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다. 그래도 기권하고 싶지는 않다. 목숨을 내건 대가로 얻은 정말 정말 소중한 투표권이니까.

내가 찍은 후보는 이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당신을 찍기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했다는 것을. 당신의 공약이 아주 마음에 들어 찍어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단지 상대보다 아주 조금 나았을 뿐이다(혹 당신이 나를 착각시켰을 수도 있다). 당신이 당선됐다 해도 내가 싫은 정책은 다음 날부터 비판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투표장에 간다. 몇 달 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오늘 때문이 아닌가.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남한 선거#북한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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