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전승훈]연아 그리고 ‘레미제라블’

  • 동아일보

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는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걸려 있다. 1830년 왕정복고에 반대해서 봉기한 7월 혁명 당시의 거리를 그린 그림이다. 가슴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 정장 차림의 신사, 죽어 있는 왕당파 군인들…. 오른쪽 끝에는 권총을 든 모자 쓴 부랑아 소년이 눈길을 끈다.

빅토르 위고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이 소년을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이름은 가브로슈.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의 제목처럼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도둑, 창녀, 사기꾼, 부랑아들이다. 모두들 가난하고, 상처 입고, 사랑을 잃고, 억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다.

이달 10일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NRW트로피 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의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을 동영상으로 보다가 눈물을 흘릴 뻔했다. 1년 8개월간의 공백을 깨고 빙상에 다시 선 김연아의 모습이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어우러져 울컥하는 감동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은 뮤지컬을 축약해 놓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시작은 2막 하이라이트 장면인 ‘바리케이드에서’였다. 박력 있는 팀파니 소리가 이끄는 강렬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맞춰 김연아는 고난도 트리플 점프를 잇달아 성공시켰다. 이어서 음악은 짝사랑하는 연인에게 고백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에포닌의 테마인 ‘나홀로(On my own)’로 바뀌었다. 피아노와 첼로로 연주되는 애잔한 선율에 맞춰 김연아는 특유의 발레동작 스핀을 선보이며 찬란한 이슬처럼 빛나는 연기를 해냈다. 그러다 결국 힘이 빠진 듯 빙판에 쓰러졌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일어섰고, 당당한 모습으로 경기를 마쳤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들은 넘어져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김연아도 밴쿠버 올림픽에서 최고의 영광을 얻은 이후 목표를 상실하고 방황했다. 평범한 대학생처럼 강의도 듣고, 교생실습도 하고 ‘CF의 여왕’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중의 시선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아직도 젊고 재능이 넘치는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해주길 바랐다. 결국 김연아는 다시 운동복을 입었다.

그가 복귀작으로 ‘레미제라블’을 택한 것은 의미심장했다. 인생의 영광과 상처, 실패와 좌절, 외로움까지 맛본 사람이 아니면 표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빙판에서 넘어진 그의 실수는, 그래서 더욱 인간적이었다. 그것은 극 중에 나오는 수많은 시련과 죽음을 상징하는 연기처럼 보였다. 또한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선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나가는 민초들의 강인함을 표현한 것이리라. 완벽한 기술의 김연아가 이번 시즌을 통해 ‘레미제라블’의 감정선까지 완성해 낸다면 누구나 울컥 증상을 겪을 것임에 틀림없다.

올 연말에는 ‘레미제라블’이 뮤지컬, 영화, 책으로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불황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고전의 힘이다. 19일에는 아카데미 영화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이 개봉한다. 국내에서는 첫 한국어 버전의 뮤지컬 ‘레미제라블’도 전국 순회공연 중이다. 펭귄클래식, 민음사에서 나온 5권짜리 완역본 소설도 2400여 쪽이 넘는 분량의 압박에도 잘 팔린다는 소식이다.

한 해도 저물어 간다. 모레는 대선일이다. 지난주 송년회에서 만난 대학 동창들과 한 해를 힘겹게 보낸 소회를 나누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아내가 넷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처음엔 놀라움을 표시하던 친구들은 “모처럼 듣는 희소식”이라며 축하의 건배를 나눴다. 고통 속에서도 내일의 꿈은 피어난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김연아#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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